물 위에 쓴 이름

 

팜므 파탈?  아닌데.

 

파니 브론(Fanny Brawne)?  아냐, 정말 아냐.
아무리 살날이 얼마 안 남았더라도 그 정도의 이웃집 여자에게 뭐 그리 매달릴 것까지야.
남들 보기엔 “전혀 아니올시다”라도,
‘그런 여자’를 두고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로 나오게 되면,
일나는 것이다.

 

                                                                      

 


그렇게 존 키츠(John Keats)는 걸려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탁월한 남자가 잠시 目갈이 삐었나, 꺼풀이 씌웠나 해서 미혹되는 바람에
대상을 실물 크기로 보는 능력을 영구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상한 천재 아니라도, 어느 누구라도 그렇지,
이성을 실물대(實物大)로 보는 한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금 과장되게, 그러나 땀구멍은 보이지 않아야.

 

팜므 파탈(Femme fatale).
그 말 자체에 무슨 주술적인 끄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괜히 애들이 이상한 말 주워듣고 와서 써먹어 보고 싶은 기분이겠지.
그런데, 마치 여자 쪽에 뭔가 있는 듯이,
남자 그것도 위대한 인물을 망치도록 홀리는 특별한 재주를 지닌 것처럼
억지 신화를 만들어야 할까?
여자가 암수(暗數)로 유혹하거나 무슨 미약(媚藥)을 쓴 것도 아니고 말이지.  

 

파니는 어린 처녀였고,
남달리 무정하거나, 철이 없거나, 천박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그만한 나이의 처녀라면 보통 그렇듯이, 약간 들뜨고, 놀기를 좋아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볼품 없고 병약한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 이유가 없었던 거지.
뭐 잘못된 거라도?

 

파니가 존을 꼬셨니?  아냐.
그녀가 시인을 죽였니?  아냐.

 

시인은 담지 못하는 독에다가 지순 지결(至純至潔)을 퍼붓고는
“어디 갔어?  분명 있었는데... 내가 분명 줬는데...” 하면서
의심하고 절망했던 것이다.

 

그게 누구 잘못이겠냐고?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구 잘못이 아니라니까.
굳이 문제의 소재를 밝히자면, 시인 쪽이겠네.

 

“파니에 대한 사랑이 나를 죽였다”?
아니고,
당시에 폐병 걸려 산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천재의 치명적인 약점은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기대한다는 것이다.

 

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그녀는 예쁠 것도 없는,
예술적 감성도 ‘별로’인,
그냥 ‘여자’였다.

 

그렇지만, 천재를 낳게 한,
가진 것을 쏟아내지 못하고 그냥 떠나지 않도록,
재촉하여 잘 받아낸,
위대한 산파였다.

 

고마워.

 


그가 좀더 살았더라면?

 

그가 오 년만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아니라, 그만하면 됐느니라.

 

그 나이의 셰익스피어나 쵸서보다 이룬 게 더 많다?
그렇게 말할 게 아니고,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이고, 키츠는 키츠.

 

베토벤의 모든 작품이 실전(失傳)되고,
교향곡 5번, 9번, 아님 현악사중주 op. 135(in F major) 중 하나만 남았더라도,
그는 위대한 거야.

 

김정식, 윤동주, 기형도가 미당 만큼 살았다면...
그런 소리 할 것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말할 건 아닌데,
시비 거는 건 아닌데,
당신이 오 년 더 산다면?
정신문화의 금자탑에 5 cm의 높이를 더한다?
(에이, 이 말은 지워야 할까봐.)

 

아까운 건 아까운 거지만,
애석한 거야 말할 것 없지만,
괜히 ‘천재 = 요절’의 공식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고,
다 그런 거지.
그렇게 되는 거라고.

 

 


거기 누웠지만

 

세번(Joseph Severn)과 브라운(Charles Brown)의 헌신적인 돌봄이야 눈물겨운 것이지만,
시인의 묘비에 군더더기는 붙일 필요가 없었지.  (그들도 나중에야 후회했겠지만.)
그냥 키츠의 부탁대로라면 이래야 했다.

 

    그 이름을 물에 쓴 이 여기 눕다.
    Here lies one whose name is writ in water.

 

이름이 물에 쓰여진다는 게 뭘까?


풀어지고 흘러가서 금방 사라진다는,
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뜻?

 

하, 비명(碑銘)은 돌에다 새기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물에 쓴다고 하면서 실은 그게 아니었구나.
그가 바란 것이 실은...

 

    환한 별아, 너처럼 붙박이고 싶어라
    Bright star, would I were stedfast as thou art---

 

거기 그렇게 별이 부동불변으로 있는 게 아니고,
몇 광년일지 모르는 거리로 떨어진 다음일 텐데...

 

그렇구나!
그냥 사라진 게 아니고,
퍼졌기에 다 알게 되었고,
흘렀기에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그는 로마의 공동묘지에 누운 게 아니고,
우리 가슴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구나. 

 

교훈을 즐기는 그 아저씨(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조금은 촌스럽고 그래도 고마운 말씀,
“시간의 모래(砂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음을”이
‘맞아, 그럴 수 있음’으로 끄덕이게 하네.

 

 


그럼 우리는

 

모든 사람은 보통 사람,
보통 사람의 모든 사랑은 특별한 사랑.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별난 사람들 아니더라도,
굉장한 이들의 굉장치도 않은 사랑 같지 않아도,
우리 사랑은 가꿀 만한 것, 남을 만한 것, 아름다운 것.

 

그런 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와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함이 얼마나 슬픈지,
그러나 지금 이렇게 있음이 얼마나 좋은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지 못하고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할 것도 아니어서,
‘허락하시는 만큼만’인 줄 알면서도
흥정하듯 구걸하듯,
그를 위해서 빌고
우리를 두고 비는 것을
이제는 사제의 성무(聖務) 일과(日課)처럼,
밥 때처럼 꼬박꼬박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