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겨울은 없다

 

그게 고1쯤 이었는가 보다.
어느 대학교 총장께서 사상계에 “너희들의 세대만 슬픈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쓰면서,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라는 서양 격언을 인용하셨다.
내가 뭐라고 그랬게?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우리는 꿀벌이 아니거든요.”
늘 슬퍼할 것은 아니지만,
슬퍼할 권리를 확인하는 뜻으로 한때 슬퍼할 수는 있지 않겠는지?

 

 

개미와 베짱이

 

이솦 우화 아니더라도, 그런 얘기쯤
‘근면’이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는 뜻으로 동양문화권에서도 만들어냈으리라.

 

    개미들이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했을 때 베짱이는 무엇을 했나요?
    그래요,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바이올린 연주만 했지요.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 되자 베짱이는 갈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베짱이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파 개미네 집을 찾아갔답니다.
    하지만 개미들은 베짱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어요.
    베짱이는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한 것을 후회했답니다.
    열심히 일한 개미들의 겨울은 따뜻하고 행복하지만,
    빈둥빈둥 놀기만 한 베짱이의 겨울은 춥고 외로운 것이 당연한 일이겠죠?
    이처럼 노력은 하지 않고 좋은 결과만 바라는 사람은 베짱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열심히 일한 뒤에 얻어진 결과만이 훨씬 값진 것이랍니다.

 

          

 

                                                             (위의 글과 그림은 ‘예지현 동화 마을 1’의 도서 소개와 표지 그림)

 

 

거 참 김새는 얘길세.

 

생태학적으로 보아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도덕군자의 왜곡이다! 
그렇게 흥분할 것도 없고, 그냥 조용히...
베짱이가 노래하는 건--비벼 내는 소리가 현악 연주 같기는 하지-- 놀아제끼는 게 아니고,
짝 찾아 종족 보존의 의무를 다하려는 눈물겨운 노력. 
보다 중요한 사실은...
베짱이는 한해살이거든.  베짱이는 겨울을 경험하지 않는다.

 

시인과 농부라도 그렇다.
지주 댁 도령이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고 중얼거린다고
“어휴 저걸?” 할 게 아니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갈 사람 따로 있고
농부에게 노래를 들려줄 사람 따로 있다.
(그런 것도 ‘사회계약설’에 포함되는지?)
시인이 농부보다 많으면?  그럼 안 돼지.

 


개미와 제비

 

새끼 제비가 어미에게 물었다.
“엄마, 저기 개미들 좀 봐요.  왜 저렇게 일만 하지요?”
“음, 겨울이 되면 너무 추워서 돌아다닐 수가 없고 먹을 것도 없고 해서,
쟤들은 여름 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먹을 걸 모아두어야 한단다.”
어린 제비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스쳐갔으나 어미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가

개미들이 갉아먹어 껍질만 남았거나, 썩은 곤충의 잔해가 수북히 쌓인 곳을 발견한 어미가 물었다.
“얘, 대체 이게 뭐냐?”
“그게, 저,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
저희도 겨울철을 대비하여 꼬불쳐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것 귀엽기도 해라, 하지만 진실은 알려줘야 하니까...
“얘야, 우리는 겨울을 맞지 않는단다.  그전에 우리는 따뜻한 강남으로 내려가거든.”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닢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사진은 ‘제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Warren Beatty와 Faye Dunaway가 열연했던 ‘Bonnie and Clyde’(p. 1967)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얼굴로 신장개업했다.
그쯤 돼야 팔리니까.

 

살인강도 도망자에게만 아니고,
우리에겐 내일이 있는가?

 

그걸 복음성가라고 교회에서 부르는데...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하루하루’가 아니고 ‘하루’를 사는 게 아닌지,
길든지 짧든지 하루.

 

그런 의미에서라면, 내일이 없겠네.

 

글피, 어제, 오늘, 내일, 모레로 이어지는 연속상영 중에
왜 ‘내일’만 순 우리말이 아닌 것일까?
그게, 올 날(來日)을 가불하여 지금 사는 것인데,
‘순간’보다는 ‘지속’으로 파악해야 안정감이 있으니까
--그렇잖으면 영험한 무당도 아닌 터에 작두날 위에서 춤추는 것 같아서--
올 날을 오늘이라는 마당(所與)으로 여기고 놀자는 거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그러는 사람들에게는
내일이 없지.

 


에피쿠로스(Epicurus)

 

‘쾌락주의 Epicurean(-ism)’라는 말은 이미 편견과 조롱이 잔뜩 들어간 딱지이다.
에피쿠로스는 그토록 대접받지 못할 정도의 잡배이었던가?

 

육체적인 쾌락이 다가 아니라는 얘기를 했던 것인데...
너무 놀아서 코피 나고 몸살 걸리면 그게 뭐냐는 얘기였는데.
행복하자면 근심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그랬는데.

 

죽음은 살아있는 동안에 오지 않으며
죽음이 마침내 찾아왔을 때에는 죽음을 의식할 수 없는데,
오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그가 옳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한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삶이 죽음을 주조(鑄造)해야지
죽음이 삶을 억압해서야 되겠냐는
내 얘기도 조금 섞어가면서...

 

 

터널은 동굴(cave)이 아니라서 나가는 쪽으로 뚫려있고,
끝으로부터 빛이 들어온다.

 

가을은 깊었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라는데,
그 풍요가 진열대나 다른 집 창고에 있는 거지
“내게는 아냐” 싶을 때,
“그만하면 여름 한 철 잘 놀았으니까”라는 생각으로
입가에 희미한 웃음 걸리면 된 거 아냐?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한 후에,
약간 엄살부리고 싶으면
과일이 제 맛들도록 이틀만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소서” 그러고.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고,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고.

 

결산은 날마다 따로.
철따라 다른 꽃, 때마다 다른 옷이니까,
이월(移越)을 기대하거나 도모할 것도 없다.

 

추위를 탈 때쯤이면
“겨울이구나” 할 게 아니고,
“가을은 깊었네” 그러자고.

 

    가을엔 기도 드리게 하옵소서
    (.....)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
    가을은 저마다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김남조, ‘가을의 기도’)

 

 


                                                                                                                   봄이 올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겨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