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핌
사이버 바둑에서 그를 만났다.
보지도 못하는데, 누군지 전혀 알 바 없이 한 판 두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헤어지다니? 만난 것도 아닌데. 지워지는 것이다.
인사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누미노제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나요?”
후에 그가 밝힌 바로는, 질문을 받는 순간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고.
뜸 좀 들이다가 그가 말했다.
“지핌.”
1
한국 종교학계에서 뭐라고 그러는지,
그것이 그의 독창인지 무슨 힌트에 힘입은 바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mysterium fascinosum et tremendum’을 뭐라 하겠는가, 그냥 (Das) Numinose일 뿐이다.
으스스함, 압도됨, 휘감기는 느낌.
그렇다고 피해 달아날 것도 아님.
그것을 ‘거룩’이라 한다면,
서양의 유일신 숭배와는 잘 맞아떨어지겠으나,
내재적인 체험이지만 어떤 형태의 초월로 나아감을 도모하는 동양 종교에는
공평함을 결여한 것이다.
그리고, ‘고시레’ 같은 것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음이고 말겠네.
‘지핌’이라, 참 대단하다.
지피다.
사전적 정의로는 “사람에게 신의 영이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다”라고 했다.
무당에게 신이 내리는 것 같은 현상을 이름이겠다.
그러니, 강신(降神)이라는 현상, 혹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지핌’을 채택해도 되겠다.
다른 뜻도 있긴 하다.
“아궁이, 화덕 같은 데에 땔나무를 넣어 불타도록 하다”라는.
고운 말이다.
신 지피면, 마음에 지핌이 있어 달궈지겠네.
그러니, 뜨거운 믿음, 불타는 헌신이라 하겠네.
2
초자연적, 절대적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도 그렇다.
물론, 경험의 강도와 질이 다르긴 할 것이지만, ‘사랑’이라도 그렇겠네.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져야 하는지...
가슴이 뛰다가 어지럼증까지 오는지...
익숙해지지 않는지...
그렇다고 도망갈 건 아니고,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렇게 끌리는 자성(磁性), 그러면서도 이탈하고픈 원심력을 두고
은혜와 가출(원죄, 타락, 배반, 뭐라 하든지 밖으로의 벡터)이라 하겠는지.
어느 날 나는 벼랑과 낭떠러지를 가로줄로 가른 듯한 길을 따라 운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안개가 몰아치더니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차에 받치거나 굴러 떨어짐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와 두려웠다.
다음에는 습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데, 익숙하지는 않지만 아주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나의 움직임이 기어감이 아니라 날아감 같은 느낌으로 여겨졌다.
사랑에도 이끌림, 떨림, 감쌈, 받쳐줌, 들뜸, 열띰,
꼭 좋지만은 않은, 그렇다고 피할 것도 아닌,
걸려들은 것 같은데 억울하거나 두렵지 않은,
언젠가 끝날 것 같은, 그리고 다시 올 것 같은,
그래서 마냥 기다리는,
그런 총체적 현묘(玄妙)의 경험이 포함될 것이다.
꼭 ‘전적 타자(Das ganz andere...)’와 관련을 맺지 않더라도 종교라 할 수 있다면,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의 형식을 빌려
“진실한 사랑은 종교보다 낫고”라고 해도 되겠다.
막 되먹은 사랑도 없진 않겠지만,
(못된 인간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랑은 두 개의 지핌으로만 가능한 숭고한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