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심판과 용서
북가주의 삼림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자란 나무들이 많이 있다.
그런 나무들이 혹 베어져서 나이테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전문가는 그것을 가리키면서 어느 해가 가물었고, 또 어떤 해에는 삼림에 불이 났던 것을 설명한다.
나무는 그의 몸에 환경과의 관계의 역사를 보존한다.
과거 전문가?
말은 이상하지만, 그런 학문들이 있다.
역사학은 집단의 과거를 다룬다.
고고학은 좀 더 오래된 문명의 흔적을 들춘다.
정신분석학은 개인의 유년시절을 캔다.
천문학이 과거를 다룬다고 할 수야 없지.
그렇지만,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별이 천문학자의 관심 안에 들어왔다면,
그것이 발하는 빛은 수 만, 혹 수 억 광년을 여행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거기’에 있지 않는 것의 지난 얘기를 이제 아는 척 하는 것이다.
아무튼, 기술과학의 발달에 따라 별들의 지난날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다보면,
거기에 제가 들린 적이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은 곳에도 상륙하게 된다.
아슬아슬했던 모험을 여행기에 올리지 않았지만,
알 만한 이들이 찾자고 한다면, 후회했기에 이미 지운 줄 알았던 기록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니, 무슨 신적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저지른 행위들의 궤적을 재현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소망사항이고, 캐자고 하면 탄로날 수밖에 없다.
손발이 저지른 일들뿐만 아니라 ‘마음의 행로’라도 그렇다.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파장과 주름은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미필적 고의(未畢的 故意)’라는 법률 용어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 28)라는 말씀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범의(犯意)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고, 그것을 증명할 방법도 있을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것이냐고?
범죄 방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서 ‘hidden camera’의 존재를 상기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고등종교는 “Somebody up there is watching you.”라는 위협과 나란히 놓일 수 없다.
죄와 벌? 범죄 행위가 발각되었기에 외적 제재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죄--결과로서의 행위 이전에 동기로서--가 발생했을 때에 이미 정죄(定罪, condemned)된 것이다.
나쁜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은 덕(virtue = good habit)이 없는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죄의 사슬(습관성, 생각의 길)을 끊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먼저 용서받아야 한다.
크든지 작든지, 일회발생적이든지 법칙기술적이든지, ‘죄’는 기록된다.
Dark record의 black box는 파괴할 수 없다.
Black box를 회수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갱생(更生)과 새 삶이 가능한 것이다.
왜 복음(福音, eu + angelion, 좋은 소식)인가?
“너의 죄 사(赦)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과거는 그대로이지만,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문제삼지 말아달라는 부탁.
가능함. 그리고, 들어주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