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은 살아있다
1959년 아님 60년이었을까, “사막은 살아있다”라는 생태보고 영화를 보면서
흥분한 적도 있었다.
(지금 보기엔 저질, 원시적 기술이겠으나) 그때는 고속 촬영이라 하지 않고
돌리기를 천천히 한다고 그랬는데, 여하튼, 선인장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머나, 신기하기도 하지.” 싶어 박수까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사막에도 생명이 있다”고 하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누가 그걸 모를까봐?”로 나오겠지만,
모든 것을 말리고 사르고 지울 것 같은 뙤약볕 아래 한 시간만 서있어 봐,
(아참, 안 돼지, 그 전에 쓰러지고 말 테니까.)
이런 데서 뭐가 어떻게 살아남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싶을 거라.
거기서 생기는 사라지게 된다.
North Texas, New Mexico, Arizona, California로 이어지는 통로가
실크 로드(가본 것처럼...)처럼 거칠지도 않고,
그게 ‘사막’이라 하기엔 망망대해(茫茫大海)로 펼쳐진 모래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리고 초록의 흔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에, 그 무슨 ‘폭풍의 언덕’인가에 나오는 것 같은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깔렸던 걸.)
‘광야’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처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루에 천 마일쯤 쳐나가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우주탐사선이 중계하던 별표면 사진처럼 생명의 흔적이 없는 벌판, 죽음의 골짜기이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불모지이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악수하고, 포옹하고, 입맞추면서,
죽은 것들에게 묵념하고, 기우뚱한 비석을 바로 세워주면서 가는 더딘 걸음이라면 알 걸.
그게, 그러니까 사막이라고도 하고, 황야라고도 하는 그곳이
시장처럼 바글거리고 광장처럼 이런저런 소동과 행사가 많다는 것을.
잠시라도 쪼그려봐.
몸을 낮추고, 뭐, 배를 깔고 누워도 되겠고... 땅을 좀 들여다보라고.
크고 작은 벌레들, 도마뱀들이 돌아다니고, 운 좋으면 전갈에게 쏘일 수도 있고,
흔치 않지만 찾기로 맘먹으면 방울뱀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늘에는 솔개, 독수리가 떠 있어서 정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가 되면
눈치 없는 들쥐 정도라도 낚아채겠다고 급강하할 것이고.
식물이라... 다박솔 하나 자라지 않는 돌산 같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유카 플랜트야 깔린 게 그거니까 그렇다 치고,
사막이라 하면 으레 선인장이 떠오르니까 그렇다 치고,
꽃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꽃 안 달았으면 어때, 풀들이 얼마나 많다고...
사막은 살아있다.
사막은 생명의 터전이고 무대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을 아름답게 하는 건?
(헤 그게 뭐 공식 같아서, 아니 철 지난 유머 같아서 대꾸하기도 싫겠지만.)
거기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집, 별들, 사막, 그런 것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고.
눈으로 보지 못하면?
“기계로 찾지요.” 쪽으로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어른들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마음으로 찾아야 돼.”라는.
(저들은 내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점수 맞기 위한 대답을 써낼 수도 있으니까.)
아무 마음으로라도? 그건 아니지.
그러니, “기계로...”라는 대답이 오히려 최소한도의 양심을 담은 게 아닌지.
그래, 물! 물이 없이는 무엇이 살 수 있으랴.
외계에 생물이 존재하는가는 거기에 수분이 있느냐는 조건을 말함이 아니던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물이 많으면 사막이 아니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우기랄 것까지야, 그러나 ‘콸콸’도 가끔 있어서
그럴 때는 마른 강(wash, 와디)이 넘쳐흐르기도 한다.
그때는 너무 시끄럽다.
환희로 웅성거리는... 모든 것이 모든 소리를 내는.
죽겠다는 신음이 아니고, 아냐, 좋아죽겠다는 말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런 소리들.
이사야의 환상이랄까 예언에서나 나오는 게 아니고, 정말 그래.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그게 너무 짧거든.
그때가 지나고서도 무슨 소리가 있다면, 그건 정말 고통이기만 한 신음일 거라.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라,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어”라고?
아, 그 “순간이여 멈추어라...”라는 말,
그냥 빨리 지나가서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 그랬겠지?
머무는 것이 시원찮다는 얘긴 아니지만,
아름다움은 대체로 빨리 가버리더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이니까.
사막의 소리들
아냐, 소리라고 다 신음은 아냐.
귀를 기울이면 이런저런 소리 들릴 텐데...
그렇지, 생명이 있으면 감정이 있겠고, 감정은 소리로도 나타나니까.
문풍지 떨리는 소리, 그렇게 스며든 한 올 바람에 촛불 한번 펄럭이는 소리,
가슴을 후비는 소리, 비명도 아닌데 소름끼치게 하는 소리,
(그리고 이건 뭐 내가 들어봤다는 것은 아니고 상당한 상상력을 동원,
게다가 약간의 기대를 보태서 하는 얘긴데...)
절정을 향하여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이가 토해내는 감창 같은 소리,
이음새가 시원찮은 함석 지붕에서 나는 소리...
뭐, 그런 것들이 있거든.
밤중에 승냥이 우는 소리도 간혹 나겠지만,
그런 소리들은 대개 바람이 만들더라고.
바람이 그런다.
“풀을 쓰러트리려고 한 게 아니라 뉘려고 그런 거야.”라고.
덧붙여, “방향만 맞으면 쓰러진 것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라고.
풀은 그런다.
“힘을 자랑할 것도, 의도를 변명할 것도, 나를 회유할 것도 없어.
풀의 본분, 바람의 성질이 나름대로 이니까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고,
그저 저 꼴리는 대로 한세상 사는 거야.”
아까 그 ‘소리’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육신을 말려버릴 것 같은 뜨거움만 가득 차고
목마름을 채울 물은 없는 곳에서
아예 목마름 자체를 부정하는--뭐 그러고 싶은-- 사람들 있잖아,
사막의 수도승 같은 이들 말이지.
그런 데로 가면 여자를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냄새 맡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럴까?
여자가 근처로 다가오지 않으면 득도에 보탬이 된다?
그 ‘소리’는 어떻게 할 수 없겠더라.
흐느끼지만 흥에 겨운 소리 같은 것이 밤낮으로 들리더라.
지나고 나니까
앞을 바라보면 언제 벗어날지 막막한 거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랬지.
아름다움은 백미러로만 확인하게 되더라고.
힘겹게 지날 때가 즐길 때이기도 했는데, 그냥 그렇게 지났구나.
언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분명해지련만,
돌아보면, 그때도 그런 대로 괜찮았더라고.
나른한 갈색, 누렁, 뿌옇고 바랜 것들, 타다 만 것 같은 것들을 지나니까
산뜻한 초록, 새파란 하늘, 여인들, 건물들이 다가오는데,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사막은 거기 그대로 있으니까,
가면 가는 거지.
꽃 피는 때, 풀도 없는 때, 견딜 만한 때, 정말 견디기 어려운 때, 다 따로 지만,
사막은 사막이더라고.
사막은 사막이기에 아름답더라고.
곧 가버려서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만 아름답다 할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있는 것도 좋더라고.
(지겨운 생각이 드는 건 나의 문제니까.
뭐 그게 큰 위기도 아니고, 그것도 지나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