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명판?  일부러 찾아다닐 여유가 없으니,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목록에 들어있으면 구입하는 정도인데,
이젠 ‘구매력’이 떨어져서 그것도 “별로...”이다. 

능력이 없는 것을 소유욕과 과시에서 벗어나겠다고 둘러댄다면,
“신 포도는 안 먹어”라는 말인 줄 누가 몰라?

 

‘백수’라고 하면 자기비하이겠으나
제 멋에 겨워 축 늘어지는 시간은 넘치도록 얻게 되었다.

 

1952년, 그러니까 그녀가 서른이 되기 전에 녹음한 것들을 듣고 있다. 
아무래도 사람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사람 소리가 아니라면 뭔데?  몰라.)

 

 

1960년대 우중충한 음악감상실에서 만난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비참하고 수치스런 스캔들 때문에 그녀를 미워했다.
그때는 ‘도덕’이 모든 것 위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실패한 사랑과 변덕, 발작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나는 레나타 테발디가 더 좋아” 그랬다. 
‘착한(善)’ 사람이라야 ‘아름다움(美)’을 모사 혹은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야말로 ‘플라토닉’이었다. 
찾지는 못했으나 정인(情人)의 이름을 Agathe로 미리 정해놓고 있었던 시절.

 

그렇지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또 누구와 비교할 것도 아니지만,
오페라에서 ‘기원전[B. C.]’은 ‘Before Callas’’라니까.

 

 

아, 그녀는 너무 뚱뚱했고, 노래만 잘 하는 괴물이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아들 날래다 딸 나서 섭섭이~”이었다. 
제 언니처럼 귀엽지도 않았고, 미운 오리 새끼는 보상심리랄까, 노래만 잘 불렀다. 
나중에 (요즘처럼 체계적인 감량 방법이 개발되지도 않았던 때에)
그녀는 30 kg을 빼는데 성공했고,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했던가, 용모를 뽐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공연 예술이라면 그것이  ‘음악’이라 하더라도 ‘시각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떡집’--죄송!-- 때문에 배역 선정에서 탈락했던 드보라 보이트(Devorah Voigt)는
고소하는 등 발광할 지경이었지만,
단기간에 38 kg을 감량하고 의기양양하게 복귀했다.  잘했어!
--사회의 편견이니 그럴 게 아니고, 살집이 풍성한 분이 미미(La Boheme)나
비올레타(La Traviata) 역을 맡는다는 건 좀 그렇잖아?--

 

칼라스가 ‘미인’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면?
그렇다고 그 ‘절창’이 사랑 받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의 사랑 행각?  비극이었지.
28년 연상의 메네기니는 그녀를 부정처럼 자비롭게 돌봤는데,
어쩌다가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 걸려들었을까.
두 용이 만난 듯이 야단스럽게 놀아대다가
승천이 안되면 그렇게 추락하는 거구나... 등,
그렇게 생각이 날아다닐 수야 있겠지만,
그런 게 ‘인류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깎을 수 있는 건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누구이더라도
처음에야 대상의 ‘탁월’ 때문에 걸려든 것이다.
아무리 ‘제 눈의 안경’이라지만,
무언가 빼어난 것이 있음을 보고 좋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 ‘우수한 것 하나’ 때문에 ‘전체'가 좋아지거나,
다른 흉 거리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좋아질 것이 아니라면 흉 하나가
다른 모든 괜찮은 것들을 가려버릴 것이고.

 

 

뒤늦게 고백한다고 뭐 달라질 게 아니지,
“I am crying in the chapel~” 격이지만,
진작 할 얘기였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어쩌다가
1959년 스투트가르트, 1961년 런던 연주,
1976년 파리 녹음을 한 날 듣고
울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사랑을 둘 다 잃었다.
‘잃었다’는 ‘있었다’, ‘가졌다’ 때문에 생긴 말.
그녀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
충분히.

 

‘가지 않은 길’ 때문에
또 다른 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Regret I had a few...
But then again, I did it my way.
됐어, 됐다니까.

 

 

누가 당신만큼 부를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러니까 다른 가수들도 설자리를 마련해주는 뜻으로
‘적어도’를 붙이고 하는 말이지만--
Norma와 Lucia di Lammermoor를 당신처럼 부를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앞으로도.
아름다운가?  아니.
감미로운가?  아니.
그냥 전율.
귀신 소리에 감동된다는 건 할 말이 아니겠지?

 

 

그런데...
‘한번 꺾이면 재기할 수 없어서’도 아니고,
하루나 갈까 말까한 꽃의 붉음(“Ah! non credea mirarti...”)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탁월을 시샘하는 세력이 있나 싶어서.
그에게 “졌습니다”라는 항복문서를 바쳐야 하는지,
그게 너무 억울한 거야.

 

나이 들어 개인 독창회를 여는 성악가들이
“이제 노래를 알 것 같다” 그러던데,
허허, 득음은 물 건너갔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오?
그냥 수줍은 표정으로 그러지.
“듣기에 거북한 줄 몰라서는 아니지만, 제가 못 견디게 하고 싶어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 저물고서야 운다는데,
철학(愛智, philos-sophos)은 추고(追考, afterthought)이니까,
전성기가 따로 없는 것이겠지?
지금 떠들어도 추한 것 아니겠지?
한낮은 너무 더우니까
저물 녘 서늘해져서 산보(peripatetic)하자는데,
그게 뭐 흉 거리인가.


해서 누구 들으라는 게 아니고,
혼자 떠들어본다.
달밤에 혼자 체조한다고 남에게 피해 끼치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