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

 

따지자는 게 아니고
 
그 옛날, 아주 잠깐 데모꾼들--‘운동권’이라 해야 폼나게 들리겠지만--과 어울리던 시절 얘기. 

누군가 소리쳤다.  “백차 떴다.” 
내려다보니 검정 찌푸차(짚)가 어느새 와있었다. 
“짜샤, 꺼먼 차를 보고 백차라고 그러면 어떡해?”
나는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그들의 ‘관심 밖’이었던가 보다.

 


‘Yellow Cab’에는 노란 택시만 있어야 하는가?

 


공영방송에서 ‘백조의 호수’를 방영하는데, 혼자 보던 아내가 찾아와서 부른다.
“흑조 차롄데 안 볼래요?”

 

Swan을 ‘백조’라고 그러는데,
자 그렇다면 Black Swan은 ‘흑백조’라고 불러야 할까? 
처음부터 ‘고니’라고 그랬다면, ‘검정 고니’라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텐데. 
아니면 아조(雅鳥)라고 그러던가.


 

아직도 그런 걸 두고 가끔 생각하지만, 지적하거나 토론하지는 않는다.
이웃들이 불편하다고 그러니까.

 


막간의 만담 같은 얘기.
어느 지방의 휴게소에 있는 화장실 영문 표기.
<WHAJANGSIL>

 

 

 

검은 고니와 흰 고니(swans)

 

 

흰색
 
보이는 것들은 무슨 색을 띠고 있다. 
꼴과 색이 있으니 보지, 무색이라면 보지 못할 것이다.

흰색은 무색이 아니다.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배운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니, 뭐라 하기가 그런데,
모든 빛을 흡수하면 검정이 되고 모든 빛을 반사하면 하양이 되던가?
(약간의 ‘물리’를 끌어오면 설명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선술집인데 뭐.)

 

빛(光)이 없으면 색(色)도 없을 것이다.
흰색은 무슨 ‘색’이다.  

 


흰 꽃?

 

‘흰 꽃’이라고 하면, 먼저 백합이 떠오를 것이고,
그 다음에 장미, 국화, 양란의 흰 꽃 종들,
그렇게 나갈 것이면 데이지, 채송화, 프리지어, 피튜니아, 도라지 등, 얼마든지 꼽을 수 있고,
치자꽃(gardenia), 작은 것들 고르라면 스노드롭, 은방울꽃, 안개꽃,
나무에 달리는 것으로 치자면 (백)목련, 배꽃(“梨花一枝春帶雨”!), 등 어떻게 다 헤아리겠는가?

 

                   

 

               

 

 

그런데, 그것들이 다 흰색일까?
크림색이라고 해야 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아, ‘크림색’이라고 하면서도 석연치 않고 무슨 부끄러움 같은 느낌까지 스며들지만,
페인트 가게에서처럼 코드로 표시하지 않는 한,
우리말로 색깔 이름을 붙인다는 게 참 어렵다.

 

 

그 ‘살색’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왕자표 크레파스를 ‘소장품’으로 여기던 세대에게는 문제가 될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자유 민주 의식이 난숙한 시대가 되었으므로
인종 편견에 입각한 인권 유린의 소지가 있다는 소청을 받아들여
‘국가인권위원회’--어휴, 뻐근--에서는
규격제품에 ‘연주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우리 애들은 ‘軟朱黃’ 같은 말을 모른다구욧!”에 부딪치자,
“흠, 그러면 살구색은 어떤가요?” “(가만, 걔들이 살구를 알까...) 약한 오린지 빛은요?”로
표류하는 모양이다.

 


글라디올러스

 

집안에서 기르는 개 냄새를 어찌할 수 없어서 치자꽃을 꽂아 놓는다.
이제 마지막 남은 치자꽃이 졌다.  쭈그러진 누렁 폐지들을 달고 있구나. 

 

“장미는 왜 꺾인 후에야 사람 곁에 올 수 있을까?”
그게 좀 그래서
장미 화분을 들여온 적도 있지만,
장미는 화분에서는 탐스런 꽃이 피지 않고
핀 다음에 들여놓아도 집 안에서는 영 모양이 나지 않더라.

 

몇 해 전에 심었던 글라디올러스가 영 시원치 않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구근이야 오래 전에 썩어 없어졌겠고.
그런데...  이게 어디서 갑자기 솟아 나온 것이냐,
흰 글라디올러스 몇 대가 기우뚱하니 서 있다.
꺾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안해서 꺾었다.
거기서 그냥 있다가 시들지 말고
얼마 동안이라도 집 안에 들어와 같이 지내자고.
  
‘당창포’라는 이름이 따로 있는 걸 보면,
개량종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도 있었는가보다.

 

‘Gladiolus’라는 이름은 잎이 칼(劍) 모양이라 그랬겠는데,
늘씬한 키와 잎뿐만 아니라 꽃이 참 잘생겼다.
그걸 어찌 깔때기 같다고 하는지, 원...
모시치마를 아주 폼나게 입은,
단정하게 매무시하고 한 자락을 팔꿈치를 붙여 잡고 있는 듯한...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자, 이게 흰색이구나.
너무 눈부셔서 빛(光)이긴 하지만 색으로 보이지 않는 게 아니고,
크림색도 아니고, 눈빛(雪色)도 아닌,
이게 ‘흰 꽃’이구나.”


꽃잎 끝 뒤쪽을 보니까
눈밝은 사람에게나 뜨일 만한 불그스름함이 묻어있다.
“어, 이거 순백이 아니...”라고 말이 나가기 전에
그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속속들이 살피는데도
귓불을 붉히지 않을 재주가 있겠냐고?” 

 

                    

 


“그건 ‘대발견’도 아니니까
남들이 흰 꽃이라고 하는 것은 다 흰색인 줄 알라”는
천둥치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