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까?

 

구강 노트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기는 했어도,
연필 하나 깎는데도 심이 몇 번씩이나 부러질 정도로 뭘 제대로 만들지 못했으니,
있는 사람들은 ‘하꾸라이’(舶來品, 밀수입한 것)를 애용했다.

 

그때에 문방구점에 가면 ‘구강 노트’라는 게 있었다.
(혹시 “아, 그래, 그런 게 있었지?”라고 맞장구치실 뿐?)
아, 그것만은 끝내주는, 확실한, ‘아쎔블’, 최상품이었다.
종이 색깔은 그걸 계란색이라고 하나, 연유(‘Carnation')색이랄까 그랬고,
들어서 비춰보면 신기하게도 영자나 그림 같은 것이 보였다.
지질이 야들야들하고, 무슨 좋은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런 것이 나왔을까?  미군 PX에서 대량 유출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래도 겉장에는 ‘구강노트’라는 상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구강?

 

그런데, ‘구강’이 뭐지? 
상품명이 꼭 무슨 확실한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는 그냥 “어감이 좋다”, “예쁜 소리다”라는 이유로 이름짓지는 않았다.
연필만 하더라도 ‘문화 연필’, ‘무궁화 연필’, ‘동화 연필’ 등이 있었다.

 

구강?  한자로는 ‘九江’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 뜻을 물어보거나 어디 있는 강 이름인지 알아보려고 해도, 알 만한 이가 없었다.
한반도에는 그런 지명이 없다는--별로 검색해본 것 같지 않지만-- 대답도 들었다.
 
나중에 꼭 한 군데에서 “아!”하며 발견했는데, 그 뒤에 ‘山’자를 더하여 구강산.
어디서?  박목월의 시 ‘산도화’에 나오잖아?

 

    산은
    구강(九江)산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참고하는 ‘풀이’들은 대강 이런 식으로 알려준다.
    구강산은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구체적 지명이 아니다.
    산도화가 동양적 이상향인 도화원(桃花園)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미루어
    ‘구강산’은 가공적인 선경(仙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간 세상이 아니라면(“別有天地非人間”!) 말할 것도 없고, 그리워할 이유도 없겠네.

 

아무 이룸도 없이 뒷전으로 밀리고 나니, 송순(宋純)처럼 ‘면앙정(俯仰亭)’이라도 짓고 싶다. 
(그게 뭐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닌데, 벌써 자조(自嘲)로 입안에 쓴 침이 고인다.)
그런 번듯한 것 아니면 어때...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여 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맛져 두고,
    강산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구상은 또 그랬다.

 

    강에 달이 둥실.
    강낭 밭에 그림자가 바삭 버석.
    마당의 코스모스가 너울너울.
    뒤란의 장독대가 빙.
    지붕 위에 박넝쿨이 살살.
          (‘달밤 2경’ 중 둘째 노래)

 

쳇, 그게 뭐 별난 건가?  장독대말고는 다 있는데...
그런데 왜 “여기는 아냐”라는 생각이?
무릉도원 일없다면, 뭐가 문제일까? 

 

나는 왜 어이타가...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몸이 새라면


구강노트(영어 과목) 첫 장에 뭘 썼더라?
‘가정법 과거’ 예문으로 꼭 등장하는 문장:
    “If I were a bird, I would fly to you.”
    이 몸이 새라면 그대에게 날아가리.
‘과거완료’ 예문은 더 김새는 것이었다.
    “If I had been rich,...(적당히)”

 

뭐 그런 돌림노래도 있었는데...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건너 보이는, 저 건너 보이는 작은 섬까지.


거기라면 뭐가 다르겠는가? 
“도토리 점심 가지고 원족(산보)를 가듯” 가면 되지.  재미없으면 일찍 돌아오고.

 

 

정말 멀다 


저 바다가 없었다면...

 

철새처럼 여럿이 같이 가는 길 아니라면,
둘이라도 같이 가면 좋겠네.


혼자 가기에는 멀고 험한 길인데...
    에헤야 가다 못 가면
    에헤야 쉬어서 가지.
그게 띄엄띄엄이라도 쉬었다 갈 뭍이 있어야.

(‘하늘길’ 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멀다.


마음으로는 이미 떠난 것 같은데,
닿을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