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3) - 석화의 찰나성
이 초로인생 살 동안
석화는 알 만한 이들이 “응, 굴 말이구나, 석화구이라고 있지.”로 나오겠는데,
石花가 아니고 石火이다.
왜 차돌멩이 두 개를 들고 부딪히면 불꽃이 튀잖아... 그런 것. 부싯돌로 일으키는.
그건 뭐 눈 깜짝할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니, 석화 같은 인생이라면, 그게 뭐 거의 ‘지속’을 기대할 수조차 없다는.
초로(草露)는 풀잎 위에 얹힌 이슬인데,
해 뜨면 언제 있기나 했던 건지 자취도 찾을 수 없지?
통기타 가수들의 ‘아름다운 것들’이나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이슬의 고움을 노래했지만,
그건 뭐 짧음이나 덧없음의 이미지로 더 널리 사용될 거라.
짧지만, 덧없이 사라지지만, 생명이 있는 동안 할 일이라곤?
사랑뿐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는데, ‘산 자’와 ‘죽은 것’.
산 자는 죽어가는 자.
그러니, 이미 죽은 자와 이제 죽을, 죽어가는 자로 나눌 수도 있겠네.
죽어가는 이들의 사랑이니까 아름다운 것이고,
거기에서 대가를 바란다면 무엇을 얻겠으며,
언제 배신할 틈이 있겠으며,
용서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도 죽지 않을 것, 사라지지 않을 것에 매고 싶은 마음은 있다.
‘영원’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랑할 기분이 나지 않으니까...
하여, 인생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 11).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s of men.”)
그때 어렸지만 뭘 좀 아는 것 같은 시인이 그랬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러면 우리 말야, 정주는 게 그렇게 두려울 것도 아니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그럴 것 아니라고.)
불꽃의 찰나성
불꽃이라 하면 불길이나 불티 양쪽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뭔지 알잖아?”로 그냥 넘어가자.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은 그 찰나성에 있다.
순간적이고 일과(一過)적인 것이라 하여 다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가치로 치자면 영속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떨어지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 왜 있잖아...
놓친 고기, 차창 밖에서 하느작거리던 코스모스, 유리(지바고)의 손에 닿지 않는 라라,
그렇게 지나간 것들에 마음이 묶여있을 때가 많지?
“무궁무궁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꽃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無窮花)라네.”
그런데, 그렇게 피고 또 피는 꽃보다
그냥 비처럼 떨어져 사라지고 마는 벚꽃이 더 아름답게 여겨지더란 말이지.
(“친일?”할 게 아니고.)
붙잡고 싶기에 아름답다는 얘기?
아니지, 아름다우니까 잡고 싶은 게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정말 놓치기는 싫은데,
잡히지가 않으면?
눈물.
우리는 공중에서 불꽃이 퍼져나갈 때에 환성을 질렀던가?
힘찬 “야~”로 시작한 탄성은 꼬리쯤에 한숨을 달더라고.
탄력 있는 곡선의 궤적이 꼬불꼬불하다가 흐지부지 흩어지는 것을 연거푸 확인하고서는
처음에는 가슴에 구멍 뚫린 듯 쏴 하던 게 묘한 안도감으로 메워지더라고.
“다 그런 거지”라는.
순간이여 멈추어라?
가는 것이라면 멈추라고 그래보겠는데,
사라지는 것이야 어찌하랴.
무슨 계약이 그랬을까?
“내가 어느 순간을 보고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렇게 외치면...
나는 기꺼이 멸망의 길을 걸어가겠네...”
(뭐 그랬다고 아주 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파우스트와 악마) (나의 그레트헨...)
실은 순간이 어디로 가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원에 포섭되더라고.
처음부터 매순간은 영원과 등거리점(等距離點)이던 것을.
한 순간이 운동하여 이루는 궤적이든지,
모든 순간이 손에 손을 잡고 이어진 것이든지
우리는 부분적인 호(弧)만 보지만,
그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동그라미(圓)가 아니던가.
순간에서 영원으로?
그렇게 건너뛸 수는 없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로 상호포섭 된 게 아닌지?
그 불꽃의 명멸과 흩어짐을 보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분과 함께 웃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