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으악~”을 연상할 것은 없다.
비명(碑銘)은 비석에 새겨진 글(epitaph)로서
보통 시구(詩句) 형태나 한자 절구(絶句)로 만들어져 고인을 기린다.
그것이 꼭 무덤 앞에만 있지는 않다.
고인이 명사이거나 생전에 공덕이 많은 경우에는
고향의 공원, 번잡한 거리, 혹은 모교에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한다.
역사의 교훈을 쉽사리 망각하고, 사자(死者)의 과거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한국인은
비명에 비난하는 뜻을 전혀 비치지 않거나 고인의 생애를 과장하여 미화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남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한세상 살면서 무슨 못된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비석을 세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튼 사랑하는 아버지요, 동고동락한 지아비요, 내게는 잘해주던 웃어른이지 않겠는가?
누구나 제 가족, 제 스승, 제게 잘해준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고,
더러 야속한 경험과 불행한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살짝 빼주고 싶겠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비명을 남기고 싶겠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의 생애는 냉정한 평가에서 제외될 수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전대의 주검 앞에서 그들의 생애라는 예를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는 아름답고 적절한 비명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과장된 찬사나 진상을 호도한 거짓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말하거나 써주게 되겠고,
아마도 나의 좋은 면만 알고 흉한 쪽은 잘 모르는 사람이 써 주기를 바라겠지.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이 예의나 인정으로 생각해준, 봐준 비명이 아니라,
자손들이 자기네 체면 생각해서 사기로 만든 비명이 아니라,
조작되지 않은 역사, 그리고 생명책에 새겨질 비명을 생각한다면,
이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넉넉하게 자리잡고 가지런히 누웠으니 다툴 일 없겠다. 광개토대왕이시여, 땅은 넓히셨는데,
누우신 자리는 '별로'이십니다.
한국의 공동묘지들도 이젠 뭐 워낙 잘 해놔서 ‘...괴담’, ‘전설 따라...’ 같은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묘지를 거닐며 죽은 자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사람들이 생을 낭비하지 않고 보람 있게 살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묘지에 성묘하러 혹은 산책하러 가서,
아는 사람의 생전의 성공과 실패, 사랑과 슬픔을,
혹은 같이 나누었던 즐거운 때를 회상하기도 하고,
거기에 널려있는 이루지 못한 꿈의 퇴색한 껍질들을 보기도 하고,
아집과 탐욕 속에서 허망하게 살다가 쓰러진 정치가,
혹은 깨끗한 연상을 주지 않는 이름난 사람들이 누운 자리를 보며
허욕 없이 살아야 한다든가 깨끗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생전에 스스로 비명을 준비하기도 한다.
어떤 이--대문호라고 하더라만--는 내 참, 이런 걸 제 비석에 새겨달라고 그랬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렇게 제 생애에 대해서거나 혹은 죽음에 대해서 냉소적인 것들이 더러 있다.
“날 만만하게 보지 마.”
“애 뽑은 것말고는 한 게 없는 사나이.”
“버림받은 이들은 울 줄 모른다.”
“죽음아, 네가 나를 이겼다고?”
바울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죽음아, 너의 독니가 어디 있느냐(Where, O Death, is your sting?)”
언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e)가 꿀린 적이 있던가?
“Against you I will fling myself,
unvanquished and unyielding, O Death.”
“다 이루었다”까지는 아니지만, 정말 일점 후회가 없을까...
“할 만큼 했어”라고 당당하게 말한 사람도 있으니까.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
(“잘 싸웠고, 경주를 마쳤고, 약속을 지켰다고”--사역, 딤후 4: 7).
“Veni, ve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듣기에 더 낫다고?
이런 것들도 있지만...
“땅 위에서 네 일이 끝났으니/ 주인께서 널 부르신다/ 이젠 그만 쉬라고.”
“친구들/ 그만 집으로 돌아가게/ 젖은 눈알들 말리고.”
키츠는 “물에 이름을 쓴 사람이 여기 눕다”라고 그랬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돌에 새기거나 물에 쓰거나 그게 그거더라.
웬만큼 지나고 나면 비문을 판독하지 못하겠던 걸.
돌에다 새겨도 나중엔 다 지워지더라고. 교회 뜰에 묻히면 더 난가?
내 생애를 몇 마디로 정리하면 어떻게 될까?
다들 좋은 이름, 멋진 비명 남기고 싶을 텐데.
“하나님의 벗”(아브라함)? 그런 건 좀 과하겠지?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요한)? 그건 그래도...
“사랑하였고, 사랑하고, 사랑하겠노라”라고 그러면?
지나가는 이들이 “저만 그런가?”라고 삐죽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