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도

 

나이 들면 은퇴해야 하는가?
아무튼, 그렇게 물러나신 분이 자리에 들면서 중얼중얼.
“내일 아침엔 새벽기도 나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가야 되는 건 아니고,
어디로 가서 모여야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늦게 잠들어도 일어나는 시각은 늘 그러니까...

 

그동안 신학은 ‘보편적인 하나님’ 얘기(theos + logos)이었다. 
그러니, 온 세상을 다스리기에 바쁘신 하나님께 면회신청 넣기도 어려웠지. 
‘지방 신(local god)’의 개념은 너무 불경한 것 같고. 
그러다가 나의 ‘구유’에 누우신 ‘나의’ 주님을 발견했다. 
나의 블로그를 찾아오신.

 


떨어졌나 했더니

 

    팝 스타에서 왕따로 내려앉기가 정말 까딱 수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지메가 괴로운 게 아니고
    집단의 허위의식을 바꾸지 못하는 무력과 자괴

    애최 날개 같은 건 없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 19)

 


포기하지 않으시는

  

    될 거 같지 않지만
    코뚜레 꿰지 않은 늙은 송아지를
    부림소로 길들이기 위해서
    끌어당기고 때렸어요
    누가 상했겠는지

 


힘 다 쓰고 나서

 

    너무 오래 날아서 기운이 다 빠진 새
    날개 치는 박자가 느려지다가 떨어지던 걸요
    남은 힘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지 않도록
    두 손 모을 기력조차 없을 때에 불러주세요
    그래도 표정만은 지을 만큼...
    젖배부른 아이가 온몸으로 만족감을 표현하며
    스르르 잠든 것처럼

 


하루 가고 이틀 가니까,
아주 안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오후 5시에 부르심을 받아 포도원에 가서 일한 품꾼도 있으니까,
더 기다려보자.

 

 

--기다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려고 기다릴 필요는 없는 거예요.
  ‘마침내’는 마침표 찍을 때에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큰소리로 장담할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도중에 있음’(Auf-dem-Wege-Sein)도 나중에 쳐주신다고.

 

 

    無聖 榮華 時代에 팔리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건 없느니라.
    성인이 멸종했으나 세상은 불편을 느끼지 않고
    강가에 나가 흐르는 물 위에 손가락으로 써서
    물고기를 웃고 울릴 수 있었던 글에 감동하지 않는데
    필요 없는 상품을 누가 만들어내겠니?

 

 

--그게 위로의 말씀?
  그러니까 이제 일자리는 기대할 것도 없다는?

--사랑하고 있잖니?
  무르고 일할래?


 

더욱 사랑

 

    사랑으로
    우리 사랑으로
    그래 사랑으로
    갈 길 가면서
    일으켜주고
    안고 업어주고
    사랑하기에 다친 걸 감사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해치지 않고
    ‘사랑했기에’란 말 하지 않고
    그냥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갈 데까지 가면서
    사랑이 사랑을 불러오기

 

 

--그럼 됐지?  그만하면 괜찮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