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과 알몸으로 부딪치기
일부러 자극적인 제목을 뽑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아(authentic self)’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
대접받지 못하는 사실(寫實)
그땐 ‘간판쟁이’ 라고 그랬다.
대접해주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림을 참 잘 그렸다. 그거야 인정하고말고.
가만, 어떡하면 잘 그린 그림? 실물과 똑같이 그린 거지.
극장 위에 붙었던 광고판 말야, 그거 어쩌면 그렇게 잘 그렸지?
지나가던 이들이 보면서 그랬다. “우와, 어쩜 딱 신성일이네...”
실물과 똑같다고 해서,
(제대로 쓰는 말 같지는 않지만) 그저 우리는 “아, 그 사실주의 그림!”이라고 그랬다.
‘이발소 그림’이라고도 그랬고.
파리똥이 덕지덕지 앉은 밀레의 그림들도 그렇게 취급당했다.
좋아하면서도...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인터넷에 떠다니는 부궤로(William Bourguereau)의 그림이 그렇다.
그게 특별히 인기를 끌 이유라도?
아, 옷을 걸치지 않았기에?
사진이라면 걸릴 텐데, “이건 ‘명화’이니까” 하면서 검열을 피할 수도 있고,
그건 뭐 지적 소유권이니 하는 점에서도 자유로울 것 같고,
벗은 아기들 보기가 좀 그렇지만 희랍신화까지 들먹일 것이고,
빛보지 못한 화가를 안됐게 생각하는 글 한쪽 붙일 수도 있어서이리라.
암튼, 그러네.
서구의 문화혁명에서 인상파가 득세한 후에 “꼭 진짜 같은...”은 진열장에서 퇴출당했다.
그런 ‘질 나쁜 사진(寫眞)’은 “애들 장난도 아니고”이니까.
사실(事實)대로?
어떤 소녀가 제 가슴을 복사기 위에 올려놨다.
“얘,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걔한테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요.”
얘야, 자기공명단층촬영이니 컴퓨터엑스선체축단층촬영--에구, 무슨 말이 이리도 기냐--로도
‘마음’은 나타낼 수 없단다.
억울할 때 하는 소리가 있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 있나?”
그러니 어쩐담?
사실(事實)은 보여줄 수 있다. 사실(査實)로 드러날 것이다.
수사관이나 법관--에이, 그놈의 ‘官’...--이 하는 일이고.
아, 뭐, ‘진상 규명’이니 ‘바로 잡기’니 하는 위원회도 태생부터 정치적 악용의 동기가 없다면,
그럴 수 있겠고.
그날그날 먹고살기에 바쁜 보통사람들이라면 무슨 ‘청문회’ 같은 데에 소환되지는 않을 것이다.
순하게 살다 가는 인생은 “이실직고(以實直告)하렷다” 혹은 “사실(事實)대로 밝혀라”라고
추궁 당하는 더러운 꼴 보지 않을 터이다.
(그래서 ‘착한 인생’, ‘꽤 괜찮은 삶’이란 뜻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도 의금부에 끌려가 맞던 걸. “네 죄를 네가 알렷다”로.)
진실이 문제겠지
그래, 보통사람이라면 ‘사실을 가리는 일’에서는 벗어나야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진실’은 가려야 할거라.
누가?
제가 할 일이라고.
진실은 제가 돌보고, 지키고, 가려야 한다.
삶은 살림이다. (희랍어 ‘bios’의 뜻은 목숨, 삶, 살림을 포함한다.)
살림이라고 해서 가진 돈으로 꾸려나가기, 세간 챙기기, 애들 돌보기만이 아니고,
제 삶이 바른 길 가도록, 병들지 않도록, 거짓으로 자라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일은 아무라도 외면할 수 없다. 누구라도 면제될 수 없다.
참을 지킴.
나는 무엇?
그런데, 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
제 성도 알지 못하는 배서방에게 “누가 묻거든 ‘배서방’이라 하라”고 배를 목에 걸어주었는데,
나중에 누가 물어보니 ‘꼭지서방’이라 하더라는 얘기.
제가 그만 먹어버린 거야. 남은 게 꼭지밖에 없으니, 제 꼴 쳐다보고 꼭지서방이라 한 게지.
나의 ‘참 얼굴’을 누가 가린 거야?
제가 그런 거지.
가면(mask)을 하도 여러 개 챙겨 다니면서 이것저것 착용하다보니,
제 얼굴이 뭔지도 잊은 거라.
그게... 첨에도 알기는 알았던가?
보통 ‘파묻힌 생명’이라고 옮기더라. (그런가?)
우리 시대의 확실한 ‘희망의 소리’ 아나운서는 ‘영미시 산책’에서 그걸 빠트리셨던가?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The buried Life’를.
묻혔고, 덮였고, 보지 못하니 잊혔고, 모르게 된 생명을, 삶을, 나를, 내 얼굴을.
나는 나야. 네가 아니고, 그가 아니고, 그들이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나는 나라고.
그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얘기.
나중에 매타작이 어김없이 찾아올 줄 알면서도 한번 부르짖어 본 것.
형편은 그렇지가 않아.
그래도 찾아보겠다는, ‘나’, 매몰된 삶, 잊혀진 나를 발견하겠다는 열망이
뜨끔거리는 아픔으로, 가끔 번지는 산불처럼 찾아오기는 하는지라...
하지만 자주, 세상의 가장 붐비는 거리에서도,
그래 가끔은, 소란스런 다툼 중에서도,
우리의 묻혀진 삶이 있는 줄이나 알고서는,
뭐라 할 수 없는 욕망이 불쑥거리더라...
그것은 우리의 참된 본연의 행로를 탐지하는데
불로 사르듯 모든 힘을 바치려는 갈망이랄까,
그토록 거칠고 너무나 깊이 고동치는
이 심장의 신비를 캐려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픈 열망이랄까.
But often, in the world's most crowded streets,
But often, in the din of strife,
There rises an unspeakable desire
After the knowledge of our buried life;
A thirst to spend our fire and restless force
In tracking out our true, original course;
A longing to inquire
Into the mystery of this heart which beats
So wild, so deep in us--to know
Whence our lives come and where they go.
사랑하는 사이라도 그러네
연인이라면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암 그래야지, 오래 떨어져있으면 이내 잊혀지니까.
사랑하지만 만나기는 싫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만나는데,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꼬박꼬박 만나는데,
시시한 농담으로 재치를 뽐내고, 말꼬투리로 티격태격하면서,
허무만 쌓는다면, 산 같이 허무만 쌓는다면...
그 높이를 장한 듯이 쳐다보면서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한다면,
그런 만남이 왜 그리도 오래 갔을까?
심심풀이로 끌고 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잖아.
잠시의 침묵이라도 거북해서
전화하고, 채팅하고, 이메일 주고받는 동안,
한 스푼의 사금을 얻기 위하여
체로 거르는 모래의 양은 얼마나 많은가.
그대의 손을 이리 주오, 그리고 잠시라도 입은 다물자,
당신의 그 투명한 눈을 내 눈과 마주치게 해요,
내 사랑이여, 거기서 그대의 가장 깊은 곳을 읽게 해주오.
Give me thy hand, and hush awhile,
And turn those limpid eyes on mine,
And let me read there, love! thy inmost soul.
사랑이라고, 아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을 열어 진실을 내보이기가 쉽지 않던 걸.
그 점에서는 사랑도 무력하던 걸.
Alas! is even love too weak
To unlock the heart, and let it speak?
Are even lovers powerless to reveal
To one another what indeed they feel?
(옮기지 않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Scarlett) 말야,
그녀는 렛(Rhett)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거야, 자신에게조차.
언제까지? 끝까지, 그러니까 그가 그녀를 떠나고, 돌이킬 수 없을 때에 이르도록.
무슨 사랑이 그러니? 저도 모르는 사랑?
진실을 가리는 방어기제가 너무 단단했던 게지.
알몸이라니?
해서 얘긴데,
사랑이란 자기 약함을 드러내는 거라고.
급소를 알려주고는, 맘에 드는 사람이 거기를 공격해주기를 바라는 거지.
건드리기만 해도 안 되는 데를 찌르고 비빈다면,
그 아픔의 통렬(痛烈)함이 오죽하겠니?
하지만, 아픔이 기쁨인 것을.
그는 그럼 꼬챙이로, 몽둥이로 다가오겠니?
그도 그의 약점, 상처, 헌 데, 혈처(穴處)를 댄다고.
그렇게 포개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라고.
갑옷을 입고서는 사랑할 수 없지.
껍질이 벗겨지지 않고서는 쾌감이 없지.
그런 의미에서 알몸이었지만,
불로그가 ‘아래아’ 모음을 지원하지 않아서그랬지,
‘알몸’으로는 쓰고 싶지 않았음을 알아줄 분 있을까.
(순짜 경상도 아저씨들처럼 모음 발음이 분명치 않은 분이라면 오히려 낫겠네.
알, 얼, 올, 울... 어느쪽으로도 통할... 몸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