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그린 그림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미술 과목에 거의 낙제를 받을 뻔한 적이 있다.
당시 담당 교사는 ‘앙가쥬망’이라는 전위그룹에 속한 화가이셨다.
그분은 내가 그려내는 과제물에 대하여 기대이하의 평점을 주셨다.
그러면, 당시 ‘김군’의 작품(?)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뭘 모르는 ‘고일’이 다다이즘의 아류를 흉내내려고 했던 것이다.
“당신도 전위작가이니 나의 비범한 천재성을 인정해 줄 수 있으리라 믿소 만...”
(죽도록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겠지?)
게다가 도화지에 빼곡이 그려 넣지 않고 많은 여백을 남기곤 했다.
(사군자친 것 보니 다 그렇던 걸.)
선생님은 ‘노력 부족’이라는 큰 글씨를 써넣어 공간을 메워 돌려주셨다.
“임마, 지금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 캔버스를 무엇으로든지 채우는 것이야.”
나는 천재(?)를 알아주지 못하는 그분을 ‘실력 없는 교사’라고 단정짓고 미워했다.
그런 말들 한다.
“나의 열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나만큼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나보다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러면, 그분께서 그러실까?
“얘, 그러니 내가 그러지 않았니, 사람은 겉을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고.
나는 너를 인정한다. 다음 인사 이동 때에는 요직에 중용하리라.”
그게 아니고...
“아직도 뭘 모르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야.”
그림과 얽혀 이런 이야기도 있다.
윌리암 헌트라는 화가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
그 날 그림의 제목은 ‘석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보고, 혹은 자신이 구상한 이미지를 화폭에 담고 있었다.
그 중에 한 학생이 언덕 위에 있는 집의 낡은 지붕을 꼼꼼히 그리고 있었다.
기와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다.
칭찬 받았겠지?
아니고... 헌트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얘야, 그 낡은 지붕을 그리는데 그렇게 많이 시간을 쓰면 석양은 언제 그리겠니?”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인생의 화폭에 무엇을 열심히 그려 놓고 있는가를.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 참!?!”할 때에는
서산 마루에 걸렸던 해가 꼴깍 넘어간 후일 걸.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너무 공을 많이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아, 나는 왜 ‘맞춤법’에 까다롭지? 돼먹지 않은 글을 쓰면서...)
주제(theme)를 놓친 사람은 주제(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다.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그리고?
인생의 유한성과 내가 의뢰할 만한 분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을 인정하자는 얘기.
해볼 것 다해 보고 가질 것 다 가졌던 솔로몬이 그러더만.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이시니라”(잠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