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베스트셀러였다는데
“이건 아냐, 이래선 안 돼” 싶은 나라는 정의가 없어서 그 꼴인지, 가만 있자 그런데 정의가 뭐지?
뭐 그런 생각에서 사 보기 시작했을 것이고
축에 끼어 행세하려는 사람들도 명품 챙기듯 구비하지 않았을까.
다 읽기나 했는지.
뭐가 뛰니 뭐도 따라 뛰는 식으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록도 고개를 든 모양인데
필독서라기보다는 부장품, 응 副葬品? 건 아니고, 설치예술의 소도구로 구입했을 것이다.
‘~란 무엇인가?’에 재미 붙어 인문학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출판사에서는 “쓸 만한 것 없소?” 라며 국내 명교수의 강의록을 찾는다는데
그렇게 구하는 게 있다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나올지?
빌라도가 피의자를 심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Quod est veritas)”고 묻기 전에
고대희랍의 철학자들, 아니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정리하자면 대응설(correspondence), 정합설(coherence), 실용주의적(use, pragmatic) 이론들이 있다.
진리란 무엇이뇨? 에고 골치, 패스.
인간이란 무엇이뇨? 지가 기면서.
사랑이란 무엇이뇨? 그게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해서 지나갈 문제가 아니지?
답변이 궁색한 질문에 대해서 일찍이 “그게 좀...”으로 회피한 비공인 공식이 있다.
“질문을 받기 전에는 아는 줄 알았는데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잡히는 게 없네요.”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랑 몰라?
다 하잖아, 넌 안 해? 해본 적도 없어?
“뭘 알아야 하지”로 나올 게 아닌 것이 누군 알고서 했나, 하면서 “이런 거구나”였지.
그래 해봐서 안다고 치고
모든 사랑은 다 진실한 사랑? 진실하지 않으면 사랑 아니라고?
순전한 사랑, 진실한 사랑, 그게 뭔데?
어떻드냐 둥글더냐 모나더냐
거짓이 없다면 진실도 없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것이겠는데
거짓이 있기에 거짓 없음이 드러나고 돋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은 실체개념이 아니고 거짓의 부재가 진실이라 하겠다.
그러면 거짓이 뭔데? 진실하지 않은 것?
꼬리 잡고 도누나.
‘True or false?’의 이치논리(two-valued logic)가 간편하기는 하지만
그걸로 인간세상 형편을 진술하고 판단하기는 좀 그렇거든.
진실에 가까운 쪽이나 거짓이 더 많은 쪽에 속해서 정죄, 비난하거나 위선 떠는 것 아닌가?
해서 얘긴데
무엇이 얼마나 섞였느냐가 문제이기는 하겠으나 ‘순수’ 부르짖을 것 없다는.
시중에서 순, 진짜, 참 참기름을 구하기 어렵거든, 그냥 “고소하면 됐지”로 지나가기.
‘먹거리 X파일’인가에서 보증해준 100% 메밀국수?
속이지 않는다는 거지, 맛은 뭐...
맛있자고 섞는 것, 그 자체로 해롭지 않은 것, 그래도 돼.
순도 100%? 금은 그러면 좋지만
증류수가 일급수는 아니거든.
{용도가 다른 거네. 식수로 사용할 수도 없고.}
욕망이 섞이지 않은 사랑? 에이 그런 게 어디 있겠어?
사랑은 거짓이 아니지만 거짓이 전혀 없는 사랑? 글쎄올시다.
{그 쪽이 편하다면, 거짓이라기보다 고백이 동반하는 과장이라고 해두자.}
문제는 섞인 비율이겠지.
배냇병 같은 장애까지는 아니고 불완전한 내장(內藏)프로그램이랄까
사람의 사랑하는 능력 말이지.
뭐 있는 것 가지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지.
{聖人은 성인의 그릇만큼, 보통사람은 보통사람일 수밖에 없는 정도로.}
맘은 그게 아닌데 잘 안 되는
안 된다고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래서 한숨 같은
때로는 슬픔 같은
좋았던 만큼 뒷맛이 “이게 아닌데”이기도 하고
괴롭기만 했는데 지나간 다음에 돌려달라고 하고 싶은
에이 뭐 그런 게 다 있어?
수도자가 쓴 글이라 “그을쎄다~” 싶기는 한데
아무튼 이해인 수녀는 ‘황홀한 고백’이라고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아가페’와 ‘에로스’로 나눈다던가 하는 이분법 “별로~”로 여기거든.
그건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이 아닐 거야.
소설, 시, 미술, 가곡, 오페라, 가요, 연극, 영화-아닌 게 뭐 있어야 말이지-에 탐닉하면서도
“나는 그런 불순한 사랑 안 해요.” 그러는 사람들은
관음증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을 도덕적 순결로 여기는 셈.
{비난한다기보다, 그렇다고 자랑할 건 없다는 얘기.}
맘먹었다고 짓는 것도 아니고 잘 관리해도 허물어지기도 하고
그게 뭐 짓거나 허무는 게 아니고
오는 거지, 온 것은 가니까 그 때에 내 말이 “좋았노라.”
피할 수도 없고, 반기고는 괴로워하고, 간다고 잡지 못하고.
비가 오도다.
“봄비, 나를 울려주는”은 아니지만
젖은 등나무 아래서 ‘blue tears’를 떠올렸는데
이미지 괜찮은 셈치고는 제목으로 한 노래들이 별로더라.
고정희의 ‘봄비’나.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눈물의 씨앗? 그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다 말 못해, 그 길고도 짧은 얘기 끝 간 데를 몰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