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2)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
한 개인의 삶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할 수 없다.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지만, 한 번에 한 삶을 사는 것이니까,
출생과 사망이란 시작과 끝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고,
낳았으면 죽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음”(히 9: 27)은 그다지 종교적이 아닌 사람이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평면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행보가 직선의 궤적을 남기는 것도 아니지만,
보통사람이라면 그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세계를 보면 되는 것이고,
삶의 나아감을 편의상 직선으로 추상해도 누가 뭐라지 않을 것이다.
출생과 사망이라는 두 점 사이의 선분--최단 거리 말고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상에서
움직이는 점--‘시간’이라는 차원을 포함하면 point-instant라고 함--은 종점을 향하여 나아간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그게 뭐 현자, 철인이라야 알 만한 내용인가?)
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I die daily)” 라고 그런 사람도 있지.
삶은 죽음과 함께 나아가는데,
S극(極)에서 멀어지면서 N극이 가까워지듯이
죽음의 기운은 점점 삶의 기운을 압도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삶의 기운이 약해졌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살았다’고 그러지, 죽은 게 아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길었다는 뜻이다.
장수하면 고생을 많이 한 것이니 수즉욕(壽卽辱)이라 하겠고,
그 아픔의 세월과 잘 견딤에 대해서 경의와 위로를 표시할 수 있겠지만,
장수했다고 자랑할 것도 아니고,
오래 삶 자체를 크게 바랄 것도 아니다.
도대체 죽음이 뭐냐니까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했다.
종교는 죽음의 준비라고도 했다.
뭘 연습하고 뭘 준비하는 건데?
죽음이 뭔데?
그러면 이제까지 무게 잡던 철학자가 “떱”한 표정으로 입다물더라고.
존경심을 내려놓고 대들기로 하면 종교인이라도 “씁”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라고.
학문이나 수행이 모자라서?
공구 선생이?
그래도,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리요(未知生 焉知死)”라는 형편은 마찬가지더라고.
한국철학의 태두라는--그런 말 듣고 다른 선생님들은 X씹은 얼굴이었지-- 박종홍 님도 그러시던 걸.
“죽음이 뭔지를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니?”라고.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은 인류가 그 축적된 지혜를 가지고 말해줄 수 없다?
그럴 것이... 죽음을 직접 경험(firsthand experience)으로 말해줄 사람이 없거든.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겠지만,
죽음은 ‘전달(communication)의 상실’이기 때문에 일러줄 수가 없거든.
그러니 산 사람은 죽음을 알 수가 없는 거라.
(죽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잖아? 말이 없으니까.)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You only live twice>(1967)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두 번 죽는다>로 옮겼고. 그건 영화고...
사람은 한 번 죽는다. 한 번 살고.
그러니까, 죽음은 ‘종결’이다. 예전에 장 마레 나오던 영화가 끝날 때 ‘Fin’이라고 그러더라.
끝난다고... 다음엔 없고?
속편(續篇)은 없으니까 ‘다음’은 없지만, 질문이 “다음엔”이라?
“After death what?”이 질문이라면 할 ‘얘기’가 있지. 그건 좀 미루고.
(아, 여기서부터는 그대에게 존댓말로 쓰고 싶다.)
그래요, 죽음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종말이에요.
아, 그래서 그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아니고, ‘몸’의 종말이란 말이에요.
The termination of physical existence... 숨이 멈추고, 심장도, 뇌도. 그리고, 분해와 부패.
그냥 그렇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게 영 그래서 롱펠로(H. W. Longfellow)와 함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그건 영혼을 두고 한 말씀은 아니었어
라고 해보지만.
그렇게 지나가는 거지요. 지나감을 모른 척 하기가 그래서
날 때 그랬듯이, 생애의 고비에 그랬듯이, 통과 의례(rites of passage)에 포함되었겠고.
그래요, 우리는 “다음에는...”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There is no second chance.
골목에서, 뭐 집안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장난을 하는데요,
팔을 들어 겨냥해서 “방방!” 하면 맞은 편에 있던 아이가 쓰러지지요.
좀 있다가 일어나던 걸요.
“밥 먹어라!” 소리에 각자 해산했다가 다시 만나면 놀이를 재개하지요.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니나여 내 노래 듣고 깨어라”?
노래 듣고 깰 수 있다면, 영원히 잠잘 존재는 하나도 없게?
(내 바지 자락을 잡으면서 제 자식 살려내라고 울던 여인도 있었지요. 내가 어떻게...
‘죽은 자식 뭐 만지기’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영안실에 벗은 채로 누인 애의 사타구니에
내 손을 끌어다가 대면서 “보세요, 아직 따뜻하잖아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그러더라.)
현실에서는 넘어졌다가 일어날 수는 없는 거지요.
(Hypnos와 Thanatos)
그러면 선 자와 누운 자로 갈라서게 되지요.
헤어짐, 아주. 그래서 영결(永訣)이라 그러는데...
차라리 이혼이라면 놓아줌, 풀림, 안도와 새 출발의 축하 같은 게 필요할 것도 같은데,
그래서 이혼식은 해도 괜찮을 듯 싶지만, 영결식은 왜?
헤어진다는 건 끊어지는 거지요.
죽음은 단절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로부터,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잃어버림입니다.
가축이 죽으면, 개가 죽어도(애견가들에게 맞아 죽을라...) 대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건 대치할 수 없는 상실입니다.
죽음은 잊혀짐입니다.
철따라 성묘하지만, 그렇게 산 사람은 의무를 이행하지만,
기억의 자락 몇 개를 반짇고리에 담긴 실토래미처럼 남겨두지만,
죽은 자의 모든 흔적은 성능 좋은 지우개로 지워지더라고.
죽음은 망각입니다.
죽음은 고통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단말마’가 없지는 않지만, 그건 보는 사람이 안 된 거지, 죽는 사람이야 모르니까요.
지독한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네.
죽음은 대역을 찾을 수 없지요?
죽음은 내가 수행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고, 비평가가 뭐랄 것도 없는, 단 한번의 연기(performance)입니다.
죽음은 하기 싫어도 피할 수 없는 징집, 그렇게 지나가야 하는 경험입니다.
아, 그 경험을 얘기해줄 수 없단 말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죽음은 바라보는 편에서 뭐라고 하긴 해도, 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경험을 일러줄 수 있다면 죽은 게 아니게요?
그래서 흉 거리는 아니잖아요?
뭘 알 것 같은 사람더러 “네 지혜로 그것 하나 일러주지 못하느냐?” 그럴 게 아니지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unborn child)더러 ‘세상’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요?
때가 되어야, 나와봐야, 지나가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만,
여기 이렇게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겠고...
통과한 ‘사람’--뭐 다른 말이 생각 안 나네--들은 말할 수 있겠지요.
지나온 길을.
우리가 그리하듯이 그들도 그렇게 말할까요?
“혼났다, 까딱하면 죽을 뻔했어...”라고.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