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3)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장영희 님은 ‘영미 시 산책’(2004/04/16)에서 딜란 토마스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런 글을 붙였다.
육신이 힘을 잃고 늙어간다고 그대로 자연의 법칙에 순명하여 죽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결국 잠들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지만, 생명의 빛이 사위어 가는 것에 분노하십시오.
별똥별이 마지막 빛을 뿜는 것처럼, 황혼이 작렬하는 태양보다 더 아름다운 것처럼,
이제 떠나기 전에 이 세상에 좋은 흔적 하나 남기려고 분연히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영혼의 불꽃을 더욱 치열하게 불사를 때입니다.
삶의 무대는 관객과 배우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가장자리가 더욱 의미 있습니다.
밀려났지만
어떤 분이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그랬다.
그건 그가 주조한 멋들어진 말이 아니고, 호랑이 담배필 적부터 쓰던 말이다.
‘주변인간(marginal man)’이라고 그러지. 상충하는 두 문화권, 혹은 생존권의 어느 쪽으로도
끼여들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계층의 인간 군(群)을 이르는 말이다.
살기는 미국 땅에서 살지만, 미국인일 수 없는 일세대 이민 같은.
그리고, “가도 타향 와도 타향 언제나 타향”이라는 노래도 있었지.
농경사회 이후 노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빨리 퇴출시키는 사회도 없는 것 같다.
아직도 할 수 있는데, 아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돌연 밀려나서 구경이나 하게 된 세대,
미안해지고 슬퍼지고 화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
삶의 무대는 관객과 배우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 의미 있습니다.
‘Good’이라고?
그 딜란 토마스(Dylan Thomas)의 시 말인데 ...
잘 알려진 것 같지만, 막상 옮기자면 제목에서부터 애를 먹는다니까.
어떤 분이 엮은 영시집에서는 “조용히 가지 마세요 저 인자한 밤으로” 라고 그랬다.
‘조용히’? 그건 그렇다 치고, ‘인자한’은 또 뭔지...
장영희 님은 이렇게 옮겼다. “순순히 저 안녕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그만 해도 알 것 같지만, ‘안녕의 밤’이라, 흠...
부분이긴 하지만, 신문에 실린 만큼을 옮겨 적는다.
그대로 순순히 저 안녕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하루가 저물 때 노년은 불타며 아우성쳐야 합니다.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시력 없는 눈도 운석처럼 타오르고 즐거울 수 있는 법,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아버지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에 “아빠,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라는 정서를
그런 경구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힘이다.
빛의 시듦에 대해서는 일찍이 전도서(Ecclesiastes) 기자가 남겨둔 말이 있다.
빛은 달콤하여라,
태양을 보는 것은 눈의 즐거움이거늘.
그러나 어둠의 날들을 기억할지니,
캄캄한 날들이 심히 많음이라. (전 11: 7, 8) (사역)
늙으면 눈이 침침해진다. 그러다가 아주 안 보이게 된다.
That good night... 저 안녕의 밤?
‘That’는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신석정)의 ‘저’이니까, 문제될 것 없고...
‘밤’은 뭐 죽음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고.
‘Good’이라고? 왜? 뭐가?
‘안녕의’? 아닌 것 같아. ‘인자한’? 아휴~
“Good night”는 “잘 자”라는 인사이지만, 거기서는 아닐 것이다.
거기서 ‘good’이란 ‘나쁠 것도 없는, 당연한’이란 뜻이 아니겠는지.
저항해야 하는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불공정한,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이다.
(시인이 나중에 그렇게 밝힌 바 있음.)
죽음은 오는 것, 그런 것, 당연한 것, 그러니까 좋을 것도 없지만 나쁠 것도 없는 것이다.
시인은 다른 련(stanza)에서 현자는 어둠이 옳음을 안다고 그랬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호락호락 받아들이지는 말자는 얘기이다.
아예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말라는 충고이다.
그러면 죽음이 안 오는가
소는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걸음을 옮길 때에 눈물을 떨군다.
소가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끌고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크레인으로 달아 올려 트럭에 실어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소는 아는지 모르는지(안다고 그래), 내키기야 하겠냐만, 그래서 울지만,
갈 길인 줄 알고 그냥 가더라.
엊저녁에 달구지 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을 오늘은 달린 것 없이 되짚어 간다.
소가 반항한다고 죽음을 면하는 것은 아니잖아?
집단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처럼...
제 묻힐 구덩이를 파는 포로들처럼...
왜 그렇게 순순히 응할까?
그러니 어떡하자고?
면할 수 있을까?
시인은 그랬다.
“당신의 맹렬한 눈물로, 어떻게 좀 해보시라니까, 저를 야단치든지 축복하시든지,
그냥 맥없이 굴복하시진 말라고요.” (원문에 내가 조금 붙인 말)
그 때 가서 저항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식인 상어의 입에 다리가 들어가고서도 살아남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싸움은 훨씬 전에 시작해야 하느니.
이것은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한우가 아니네.
중섭은 어디서 이런 소를 찾아냈을까?
"말 못하고 몰리는 소"(Longfellow)도 아니네.
죽음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 싸우자고 달려들면 혹 연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자면 전쟁 부담이 꽤 먹힐 걸, 꼴도 말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노도(怒濤)를 일시 막는 시늉을 해보지만,
저 해일(tsunamis)이 밀어닥치던 장면을 보고 나니...
어디 당하겠던가?
그러니까, 죽음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겨뤄보자는 것은,
잘 살자는 얘길 거라.
죽음이 근접하지 않았을 때에 힘껏 일하고 한껏 즐기는 것.
잘 사는 게 잘 죽는 길.
잘 죽으면 죽음에게 당하지 않는 것.
삶이 아름다우면 죽음도 알아서 대접해주더라고.
“다 이루었다” 한다면 이긴 것 아닌가?
어떤 이는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그러더라.
혹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량없도다” 그러던 걸.
사족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은 암을 이기고, ‘Tour de France’에서 7연패(連覇)를 했다.
하는 말 보게.
Before cancer, I just lived.
Now I live strong.
그때 소식을 듣고, 나는 쪽지를 보냈다.
“Do not go gentle into damn good night” 라고.
험하게 말해서 그런가, 일시 물러났네.
아주 가기를.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