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4)

(주: ‘비공개’로 묶어두지는 않았지만, 사적 기록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치시기를.)

 

 

죽음에 대해서 말하자고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모든 사람은 세금을 내야 한다. (수입이 있다면 말이지.)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세금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대개 불평이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런 줄 알면 되지, 말할 건 없잖아?  해서 그것은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제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정지용이 그랬던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
뭐 ‘호수’, 그런 게 아니고,
눈을 가리면 눈부심에서 벗어나는 거지 햇볕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처럼, 죽음이 아예 없는 듯이 무시하더라도 죽음은 늘 거기 있더라는 얘기.

해서 얘긴데, 요즘 말로 ‘공론화(公論化)’하자는 제안.
말하면서 지혜도 나누고 같이 준비하자는.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말했다.
내게는 죽음이 오지 않는다고.
(그러니 두려울 것 없다는 얘기.  그러니 말할 것도 없다는 얘기.)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게 되면 그 죽음을 의식할 수 없다고.

 

그런가?
그래서 두렵지 않은가?

 

죽음은 어떤 시점(時點)같은 것일까?
선으로 표시되는 그래프에 빈 동그라미처럼 가로놓인?

 

어쨌든, 죽음을 외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쳐다보지도 않는 게 차라리 맘 편안하겠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어떤 죽음을 택하느냐’는 것은 산 자의 권리이거든.
아니 의무라고 할까.  

 

 

 

 


죽음은 삶의 일부

 

삶과 죽음이 공유하거나 포섭하거나 참여하는 관계라고 하면
설명이 좀 길어질 것이니,

 

“이내(以內)는 경계까지 포함하며,
시발점과 종착점인 출생과 사망은 삶에 포함된다.”
로 지나가자.

 

출생이란 생명을 얻은 자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지만,
사망은 생명을 누린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들을 제시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고 그랬는데,
매듭이 시원찮으면 모음(取得)과 이룸(成就)의 갈무리가 되지 않는다.
묶이지 않은 자루에 담긴 쌀, 감자, 돈 같은 건 나르지도 못하고 다 흩어지고 말겠네.

 

비명(非命) 횡사(橫死)야 어찌 하련마는,
그리고 그게 요즘에는 전보다 흔해졌지마는,
그 경우에조차 준비한 사람이라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으리라.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 남아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는지에 상관없이.

 

리본은 선물의 일부이다.
포장에 현혹될 건 없지만, 정성스런 선물은 예쁘게 포장되지 않던가.
생(生)이라는 고귀한 선물은 그에 어울리는 리본과 함께 주어지는 게 제 격이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바흐는 그런 제목으로 칸타타를 빼놓고는
같은 주제를 다른 곡들에 넣어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언뜻 받는 인상처럼 ‘사(死)의 찬가’는 아니다.

 

아 그 존재의 열망이란 항상 두 방향으로 내뻗는 것이기에
삶의 환희를 갈구함과 귀소본능 같은 그리움으로 죽음을 바라봄은 공존하며,
(Lebenslust = zest for life & Todessehnsucht = longing for death)  
구심력과 원심력이 맞물려 돌아가는 긴장 가운데
존재는 부여(賦與, 附與)된 시간을 살아간다.

 

그 시간은 빈 수레로 지나가지 않고
맡은 자의 삶으로 채워지는 역사(산 시간, lived time)이며,
거둔 내용물에 따라 ‘위대함’, ‘그저 그럼’, ‘형편없음’ 등의 판정이 따르지만,
점수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수(秀), 우(優), 미(美), 양(良), 가(可)로 나누기로 한다면,
어느 삶은 귀하지 않겠는가.


판정 자체가 불공정하게 여겨질 때에
어떤 절대기준이랄까 최고가치로부터 모든 삶이 동거리점(同距離點)이라 믿고,
꼴찌는 없으니까, 가(假)만 아니라면, 가(嘉, 佳)라 해도 되겠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문화/종교 권(圈)에서는
가(迦)라 해도 되겠네.

 

건강한 ‘죽음에의 동경’은 허무주의가 아니고,
삶이라는 신성한 의무의 중압감을 벗어나고자 함도 아니다.
고갯길 너머로 드러난 하늘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끝’이 아닌 ‘처음’, ‘새로운 시작’을 뛰는 가슴으로 맞이함이다.


고등종교라면--그 일부는 항상 타락하였고, 거짓 메시지를 전하지만-- 무엇이라도
허황(虛荒)한 세계(vanitas mundi)에 집착하지 말기를 권하지 않겠는가.
벗어남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고,
등짐을 놓았기에 좁은 문을 통과하여 새 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

 

가사만 가지고 말하자면, 어떤 기독교적 노래/음악과 메탈 뮤직(Death Metal, Black Metal)이
다같이 죽음을 찬양한 듯이 보이지만,
[악마의 간교함은 항상 ‘유사성’을 숙주(宿主)로 삼고 치명성을 확장한다.]
(잘된) 종교음악은 절대긍정을 향하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통로인 데 반하여,
메탈 뮤직은 자기 파괴의 본능을 자극하지만 부정 뒤에 오는 세계를 제시하지 못한다.
하나는 빛으로, 다른 하나는 어둠을 향하여 나아간다.

 

살아있음이란 날마다 죽음을 이김이다.
국지전에서는 그렇고, 총체적이고 우주적인 전쟁에서라면
죽음을 죽임, 사망이 생명에게 삼킴을 당하는 승리로 나타나겠는데,
그 승리에 동참하여 전리품을 얻자는 지원(志願)이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로 나타난 것이다.

 

죽음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생명의 주인께서 죽음을 허락하셨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