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5)

 

남은 날들은 무조건 복된 날들인 줄이나 알고

 

저녁밥 들면서 양주가 나누는 얘기.
    --나 오늘 죽다 살았어(살아났어).
    --에구, 저런, 큰일날 뻔했구려.
아마 자칫하면 교통사고에 연루될 뻔했다는 얘기일 거라. 
과장을 감안하지만, 죽을 뻔했다고 치고,
죽을 뻔한 게 작은 일이라 심드렁한 투로 시시한 것 취급해도 되나?

 

정말 죽을 뻔했다면, 그런데 살아남았다면...
남은 날들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살아있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아니 사랑하기에 살 가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된가.
그런 데로 생각이 미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기분이 찜찜(?)해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종합검사를 해봤다.
웬일인지 조직 검사를 해야겠다고 그러네.
“이 사람들이 의료수가 올리고 싶더라도 그렇지, 어찌 이런 ‘고소’급에 해당하는 일을...”
그런 마음이었지만, 피할 수 없었겠지.
통보 받는 날.  아니 우째 이런 일이...  내게 말이지.
췌장암이라고 그랬다.  남은 날이 길어야 육 개월이라고.

 

택시 타는 곳까지 내리막길을 걷다가
우주유영 하듯 허공을 짚던 다리가 휘청하자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시의 소음이 말도 할 수 없을 텐데, 이상하게 매미 소리만 크게 들렸다.
“네놈들은 뭐가 좋다고 떠들어 대냐...”라고 하려다가...
“가만 있자, 이놈들은 기껏해야 보름이나 살까, 그런데도 소신껏 울어제끼네...
나는 훨씬 더 남았잖아...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매미는 땅속에서 유충으로 수 년을 보낸 후에 성충이 되고서는 몇 주를 살지 못한다.)


췌장암 말기라면 얼마나 아팠을까.  진통제 투여도 점점 잦아졌고.

더도 덜도 아니고 그렇게 육 개월을 누워 있다가 떠났는데,
나중에 가족들 하는 얘기로는 (그들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고통 중에 덜 신경질부리는 것이었으리라.
장마 때 가끔씩 해 나듯, 힘겹지만 웃어주어 가족들의 고생에 감사를 표시하는 것과.   

 

 

                  

 

 

   

수평적 vs 수직적 죽음

 

소학교 도화(圖畵) 시간에 들은 수준인데,
수평 구도는 평화, 안정, 고요, 수용 등의 느낌을 갖게 한다고 그랬다.
수직 구도는?  압도, 배타, 불안과 함께 경건, 장중함을 나타낸다고 할까.

 

 

           

 

 

수평적 죽음과 수직적 죽음이라는 얘기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죽음의 순간을 누워서 맞이한다?  다 그런 것 같지만, 아니다.
현대에는 선 채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일까?  전쟁, 처형, 대형사고, 천재지변, 등.  횡사.
결국 뉘어지기는 한다.  안식이니까.
죽음은 RIP[Rest in peace]이니까.

 

석가 세존은 누워 슬퍼하는 제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았다.
그때는 그런 말이 없었겠지만, 입적(入寂)이라 하겠네.  적정(寂靜)일세.
예수님은 선 채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았다.
그것도 땅에서 떨어진 채로.
그것은 절대고독, 그리고 “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는 도전, 배타, 승리,
그리고, (비록 땅 속에 묻히는 기간이 있었지만) 승천하는 자세이다.

 

동서양 문화랄까 종교를
그렇게 두 어른의 죽음의 모습으로 견주어볼 수 있겠는지.
뭐, 끊임없이 교차하니까, “이거는 이렇고...”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 ‘사막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때문에 세상이 소란한 걸까?
불교 문화권이 오래 동안 쳐지기는 했는데,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이던 걸.

 

벡터(vector)의 화살촉은 상하, 혹은 좌우를 가리키는데,
생명이란 은혜랄까 하늘로부터 내리는 햇빛과 비를 얻고,
흩기도 하지만 섞이게도 하여 불림(繁殖)을 가능케 하는 바람 덕을 보는데,
그러면서 향일성(向日性)이라고 오만하게 세우기도 하고,
옆으로 퍼짐을 생존권 확보라고 그러다가 영토권 다툼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게 사는 모습이라고.

 

활동사진(motion picture)은 피사체의 움직임을 전제로 하니까,
간단히 수직 구도와 수평 구도로 나누지는 못할 거라.
죽은 것은 동물이 아니니까, 가만히 있으니까,
때가 되면 다 수평선에 수렴되는 것일까?
튀어나오다가 집중사격을 받는 이소룡(Bruce Lee)의 움추린 중심/원형 구도가 아니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끝날 때는 누운 모습으로, 그러니까 수평 구도이어야
관객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사는 동안 어떤 굴곡이 있었든지 나중에는 나란히 누우면 좋겠네.
포개지지 않아 평행선으로 남을지라도.
그렇게 눕게 되면, ‘A time for us’라고 그러더라.

 

    And with our love, through tears and thorns
    We will endure as we pass surely through every storm
    A time for us, some day there'll be a new world
    A world of shining hope for you and me
         (영화 ‘Romeo and Juliet’의 주제가 중에서)

 

 

                                                         

                                 

 

사람들은 선종(善終)이 아니라고 기피하더라도
수직적인 죽음이 있기는 있어야 할거라.

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꼿꼿이
꽂혀
꽃으로 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