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그 치사한 이기주의
제 조상의 묘는 새로 발견한 명당으로 옮기고,
상대 후보의 선산을 파헤치고 산소에 식칼을 박아서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야 무지막지한 무속인이 그런 것이지 누가 시켰겠냐만... 그렇지?)
에고 어찌 그런 땅에서 살겠냐, 경호업체에게 산소 경비까지 의뢰해야 하는지.
이제 뭐 동무들이 그리운 건 아니다. 관심이 달랐기에 할 얘기도 별로 없고.
같이 놀던 곳, “옛날의 금잔디 동산... 같이 구르며 놀던 곳”에 서고 싶은 것이다.
하긴 거기 산다고 해서 ‘그때 거기’는 아니니까, 그들도 갈 수 없는 형편은 마찬가지이리라.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무엇이 그것들을 사라지게 했을까?
산 자의 욕심이 파헤치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세우면서 변경시킨 것이다.
채석장, 광산 그런 것들 다음에는 공장과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산천을 피폐케 했다.
그것은 재벌형 부정부패.
아기 재우다가 고단한 육신에 쳐들어온 수마(睡魔)를 어쩌지 못해 같이 잠들은 어머니,
그 누운 모습 같은 능선, 그리고 오지랖쯤에 무슨 골 혹은 말로 불리는 집들이 몇 채 있고,
치마 자락쯤에 옥답(沃畓)이 있고 그랬는데,
“아름다운 이 강산~” 하면서 눈이 따라가는 선이 살짝 요동칠 자리에는
어김없이 묘가 들어서 있다.
도무지 수줍다던가 그런 모습이 아니고, “왕후장상까지는 아니지만, 나 당대에 잘 나갔어.
후세 인들이라도 알아주기 바래.” 라면서 쩍 벌린 포즈로 누워있는.
그건 가내기업형 비리.
발복(發福) 기원(祈願)의 음택풍수(陰宅風水)는
불효 막심한 자손들의 이기심의 발로이며,
조상과의 선한 연결을 끊고 어머니 같은 대지를 파훼(破毁)하는 악랄한 수단이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차지하는 땅이 더 많은 나라에서
저 하나, 제 집 하나 일어나겠다는 욕심으로
산하의 흐름을 끊고 길을 돌리고 땅의 기운을 쇠하게 하는데,
어찌 바람과 물을 다스릴 수 있으랴.
사람이 환경에서 얻는 것이 있으려면 사람이 환경을 돌보아야 한다.
나를 키우신 어머니의 고단함을 감사와 사랑으로 풀어들이듯이.
저 혼자 살아남으려다가 다 죽이고 저도 살지 못하는 비극은
우리의 의식과 의도에서, 일상의 크고 작은 거래에서, 생각 없이 저지르는 행위에서
오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빠지게 되어 간주곡처럼 아주 따로 떼어내었지만...
죽음의 준비란 뭘까...
‘내세’ 관념이 정립되지 않은 문화권이기는 하지만,
예전에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의 죽음 준비는 명당을 찾는 것이었다.
우암(尤庵) 송시렬(宋時烈)만 하더라도 우리 정신사에서 작은 이름은 아닐 텐데,
그는 죽기 20년 전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지)를 잡아두고,
풍수가들을 불러다가 묏자리의 장단점을 토론하곤 했다.
이십 년 전에 죽음을 준비한 예지는 그런 것이었다.
천상병은 ‘귀천(歸天)’이라 했지만,
외래종교의 영향권에 들지 않은 우리 의식 속에 ‘귀천’이라는 선명한 개념이 있는지?
‘극기(克己) 귀천(歸天)’이라 하더라 마는.
섬진강 자락일 거라... (이미지 출처: 환경운동연합 싸이트)
이쪽은 미국, ‘역마차’의 주제곡이었던가, ‘O bury me not on the lone prairie’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