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6)

 

죽음 뒤에 오는 것 A

 

그만 해야지, 무슨 논문도 아닌 터에 잘난 척 할 이유도 없고, 
듣기 싫다는 얘기는 하지 않으면 되지만,
들으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하고 싶었던 건데,
이젠 나도 지루해진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니까, 딴전 펴기도 하면서 갈 만큼 가는 거지 뭐.

 

 

1

 

성삼문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이런 시를 남겼다.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북소리 울려 목숨 취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 (회수일욕사)    고개 돌려 보니 뉘엿뉘엿 해는 떨어지려는데
    黃泉無一店 (황천무일점)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 하니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고

 

그게 그렇다.  뭐가?
절개로 친다면 으뜸 그룹에 들어가고도 남을 분이지.  보라고.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이셔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단근질하는 형리(刑吏)에게 인두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그를 지지라고 호령하였다니,
‘깡다구’로 치더라도 ‘맞장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허무해졌던 것이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의연했지만,
“이게 뭔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가면 끝이구나.”라는 느낌은 숨기지 않았다.

 

 

2

 

다른 얘기 하나.
어떤 사팔뜨기 아저씨의 죽음.
(눈이 어떻다는 게 아니고, 그는 살아서 삐딱했거든. 
그 비뚜름하니 쳐다봄을 늘 당당하게 여겼지.  그 눈초리를 자신 없는 사람들은 피했고.)
누구 얘긴지 알겠지?  (이름 밝히지 않아도 되겠네, 나도 그를 좋아한 적이 있었으니.)

 

1980년 3월 파리의 한 병원에 거물급 지식권력층 인사가 폐수종으로 입원하였다.
그의 투병 자세는 존경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워서 병명도 물어보지 못하면서,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저주하고, 욕하고, 집어던지고, 누가 말릴 수도 없도록 발광하였다.
4월 16일인가 그가 사망하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들과 중량급 인사들의 애도 속에
묻혔는데, 궁금하지만 묻기도 그런 질문을 어느 언론매체가 활자화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왜 그래야 했던가를.
       답이랄 거야 없지만...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
‘자유’라는 복음의 전도사는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자유라면 ‘선택의 자유’이었겠는데, 죽음이라는 막강한 권세는 ‘선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조롱의 뜻을 가미하여 메시지 화(化)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가 꿋꿋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3

 

나는 이성의 검토 끝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전적 배제를 생각해본 적은 없고,
자주 권하기도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미 당신에게 근본적인 가르침이 잘 박힌 대못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자리잡았다면
아 그러면 됐지, 더 할 말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말야, 신상명세서에 ‘무종교’라고 밝히는 이라면,
이렇게 주책 부림을 용서하게나.

 

그 ‘죽음 뒤에 오는 것’의 신화적인 묘사가 싫더라도
뭐가 있기는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믿음씩이야... 그냥 요청이라도 해야 될 것 같지 않은지?
뭘 몰라서 용감한 게 아니고, 그 ‘절대 무(絶對 無)’를 감당할 수 있겠는지?

 

“죽음이 뭐 별 거라고,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지는 게야(死也一片浮雲滅)”라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가르침이 될 수 없지.
 ‘말짱 헛것’,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누나”라는 말은 노름꾼이 하는 말 아닌가?
어떤 종교라도 죽음 뒤에 오는 것에 대해서 침묵할 수는 없거든.

 

성경이 절대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에 그렇게 써있으니까”라고 그러면,
그 말을 내세(來世)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채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내세를 믿음도 그러네.  그것은 보험증서가 아니잖아? 
내일의 ‘만약(what if)’을 대비하여 오늘 조금 지불하고 안심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잖아?
대단하지도 않은 선행에 큰상을 기대하는 것도 그렇고.

 

(그 무슨 영화 제목이었는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러면 오늘이 어떻겠냐고?  오늘도 이미 없는 거야.
내일 일을 알지는 못하지만, 내일이 있기는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

 

내세(life after death)에 마음이 묶이면 좋을 것도 없지만,
적어도 내세가 있는 줄이나 알면,
현세(life before death)가 탄력을 받는다고.
믿음이란 그런 거라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글에서 ‘믿음’을 ‘희망’이라고 하는 게 낫겠네.
믿음은 있음을 돌아봄이고 희망은 있을 것 같아서 바라봄이니까.
믿음은 과거, 희망은 미래를 다루는데, 그럼 현재는 누가 돌보는가?  사랑.
지금 형편이 어떻든지 할 것은?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 3)

 

믿음은 희망의 인식 근거이고, 희망은 믿음의 존재 근거이겠는데...
가만, 자다 일어나 봉창 뜯는 소리.  “골치...”이거든, 잊어버리시게나.]

 

 

그러니 말일세, 우리 ‘오늘’을 위해서 ‘내일’이 있음을,
금생(今生)이 즐거우라고 내세가 있음을 인정하자니까.
내가 언제 긍정의 대답을 받자고 손목이라도 비틀었던가?
그도 그렇겠다 싶어 고개 끄덕이면, 내 한 잔 사겠네.
(그것쯤이야 못 하겠는가...)

 

 

그래도 못 다한 말이 있는가?  아, 한 마디만.

    내일은 오늘과 다르거든. 
그걸 어떻게 아냐?
    우리가 알고 있는 지나갔던 내일들 말일세, 그게 다 달랐잖아? 
    그러니, 다음 내일도 그렇지 않겠어?  오늘과 다른 모습으로 올 테지.

 

 

                                                                         (Lux Benig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