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전주

 

뉴욕에 있는 막내에게서 전화를 받고 나서 그대로 쓰기 시작한다.

 

“아빠, 나 지금 지하철로 내려가는 길이라 오래 전화할 수 없어요.”
(서울처럼 지하철에서도 휴대전화가 먹통이 안 되고 잘 터지는 세계 도시는 별로 없다.)
Bass는 죽이고 Treble만 잔뜩 높인 것 같은 목소리, 아마 좋은 일로 전화한 듯 싶다.

 

“오늘 180불 짜리 수표를 받았어요.”
“그럼, 임금이 올랐다는 뜻이냐?”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준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그게, 보너스인 셈이죠.”
“보너스?  네가 특별히 잘 보일 일이라도?”
“Summer job 하던 학생들이 다 떠나고 나만 남았거든요.  불쌍하게 보인 모양이죠.”

 

아들은 여름에 뉴욕에 머물면서 일을 하겠다고 그랬다.
방학중에는 기숙사를 이용하지 못한다는데, 비싼 임대료를 내고 나면 뭐 남는 게 있겠냐,
그러니 집에 오라고 그랬지만, 집에 와서 빈둥거린다고 더 좋을 것도 아니고,
이미 구들직장이 버티고 있는 형편이니...
선배들과 어울려 다섯이 침실 하나 짜리 아파트를 빌렸는데, 
끗발이 밀리기에 그가 자는 자리는 화장실로 가는 복도이다.
지난주에는 이틀 동안에 쥐 세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니, 바닥에서 자는 아들 몸 위로도 다녔을까?)
녀석은 밤거리를 헤맨다.  부랑(浮浪)소년도, 더욱이 불량배는 아니지만,
그런 숙소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어서 도서관, 책방, 레코드 가게 등을 전전한다.


오늘 180불의 가외 수입이 생겼으니,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겠다.

 

 

1 보너스

 

보너스라.  내가 보너스 받아본 적이 있던가...
(아, 이게 비교하는 마음.  불평과 시기의 근원.)


그러고 보니, 내게는 ‘본봉’ 개념이 없었기에 ‘보너스’를 받은 것 같지 않았을 뿐이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 보너스이었다.

 

보너스(bonus, 賞與金)의 사전적 정의는 ‘급료와는 별도로 더 얹어주는 돈’이다.
주면 고맙고, 안 줘도 그만이다.
물론, 처음부터 “본봉 이외에...” 식으로 계약을 맺는 일이 흔해지긴 했다.
이제는 ‘안 줘도 그만’은 아니리라.  당당히 요구할 수도 있겠고.
가외 수당의 크기도 노사 분규의 주요 쟁점이라고 한다.

 

이렇다 할 직장에서 일해보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보너스는 주는 사람 맘대로.  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누가 요구할 수 있담?

 

 

2 은혜

 

예배가 끝나자마자 장로 한 분이 찾아왔다.  안색이 좋지 않다.

“거 듣자하니 ‘명상’이라는 말을 생각 없이 뱉는데, 그건 불교용어이니,

다음부터는‘묵상’이라 하시오.”

흠, “아, 그렇습니까?  일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가려 사용하겠습니다.”
라면 될 것이다.  (되긴 뭐가 돼?)

“아, 그 어두울 명(冥) 자가 걸리신 모양이군요.  그러면, 눈감을 명(暝) 자를 써도 됩니다.
명상이나 묵상이나 다 같은 뜻이고요, 명상이 불교에서만 쓰는 말은 아닙니다.
불교용어로 말할 것 같으면, 은혜(恩惠)나 기도(祈禱)는 불교에서 먼저 사용했는데,
기독교에서 허락 받지 않고 가져다가 쓰는 형편입니다.”

자, 그러니...
“‘은혜’가 기독교 개념이 아니라고 그러더라”는 ‘카더라 방송’이 나간 후에,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배운 이들도 등을 돌리고.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얻은 사랑, 호의, 특혜, 선물이다.
영어로는 ‘unmerited favor’라고 할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 부처님, 하늘, 등 위로부터 베푸신 사랑이겠으나,
나중에는 사람들 사이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목사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설교를 잘했다는 칭찬으로 사용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오용이다.  어디서 그런...

 

 

 

                                                                                                     

 

3 우수, 덤

 

‘덤’은 “제 값어치의 물건 밖에 더 얹어주거나 받는 일”이란 뜻이다.
요즘에는 흔하게 들리지 않지만, ‘우수’라는 말도 “일정한 수효 밖에 더 받는 물건”이란 뜻이다.

그것은 ‘공짜’라기보다 ‘가외’로 쳐준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살고 나면,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라는 생각이 들까?
살아온 햇수뿐만 아니고 어떤 세월을 보냈느냐에 따라 헤아림이 다를 것이다.
비명 횡사가 잦은 난세에 사는 사람들은 철들면 그저 덤으로 사는 줄로 알아야 할 것인데.

 

덤이라고 아깝지 않겠는가?  좀 더 받고 싶지 않겠는가?
그리고, 덤으로 받은 게 더 달더라.

 

영어 ‘priceless’를 옮기자면, ‘값-없이’는 맞는데,
값이 없으니까 ‘싸구려’ 혹은 ‘공짜’라는 뜻이 아니고,
‘값으로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이란 뜻이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
그건 은혜이고, 덤이고, 우수이다.
그것은 값으로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특권이고, 선물이다.

 

 

4 경이(驚異, wonder)

 

은혜는 감동이 없이는 인지할 수 없다.

 

감동(感動)은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이겠다.
처음에 건드림(touch)이 있고, 그래서 떨림이 발생하고, 그것은 울림으로 이어지고,
공명상자를 통해서 퍼짐으로 나아가는 현악기를 생각해보자.
심금(心琴)을 울린다고 그랬지.

 

경이는 ‘놀라서 이상하게 여김’이다.
무엇을 보고 당연히 여기지 않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눈여겨보고,
눈여겨보았기에 새로움을 발견하고,
그 새로움을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고,
이제 알게 되어 기쁘고,
그 기쁨이 다른 기쁨을 몰아오고,
점입가경(漸入佳境)처럼 한 발 디디니까 다음 발이 따라오고,
그러면서 기쁨과 고마움이 벅참에 이르게 된다. 

 

경이를 유발하는 것도 은혜이다.
그래서 ‘surprised by grace’라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이 뛰네”라는 그 설렘이 없다면,
그게 뭐 사는 건가.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
          -William Wordsworth--

 

아 좋다.
참 아름다워라.
(보기에도 좋아야 돼.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정말 고맙구나.

 

 

 

 

 

5 밀려난 이들에게

 

이 글은 준비가 안된 채로 밀려난 이들에게 드리는 편지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밀려난 게 아니게?
놀고 싶으니까, 그래도 살 만 하니까, 그만 두겠다면,
그거야 누구나 바라는 거지.  그건 기쁘게 자원할 만 하지.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놀고 싶으면 아무 때라도 그만 두게,
그걸 바라보면서,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로 살아온 것 아닌가?

 

밀려나고 오래 되니 좀 그렇다.
첨에는 더 좋은 자리가 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가만있다고 뭐가 생기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좀 알아봐야...”라는 얘기도 듣는다.

 

나중에는 모르겠다.
지금은 이대로 괜찮다.
(들키지 않게 입 가리고 웃는다.)

 

무슨 특별한 은혜라도?
아, 그게 좀 말로 하자니 그런데...  
블로그질 할 수 있는 은혜.

 

모자 썼을 때는 할 수 없었던 말,
많이 박아둔 명함이 쓸모 없이 되었기에 쓸 수 있는 글,
가진 건 시간뿐(무진장은 아니지만),
해서 아이가 보너스를 받고 좋아하는 기쁨이 내게로 전달되었다고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는 여가,
그렇지만 결격사유를 만든 건 아니니까
(이만한 사람도 많지 않을 텐데, 왜 날 못 찾지?)
언제라도 다시 쓰임 받을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다.

 

 

      

 

 

 

후주

 

세월은 속일 수 없다.
쉽게 감동할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약간 경망스러운 ‘오버’에도 진심이 담긴 것으로 봐주고 넘어간다.

 

무슨 징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다가오기로는 먼 데 있는 것이지만,
이별을 감지하는 데도 담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