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Communication) 1
길게 말하면 웃지 않는다
그때 앵벌이들은 그렇게 시작했다.
“차안에 계신 아주머니, 아저씨, 형님, 누님께 한 말씀 올리겠어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저는 오늘도 배움의 길을 찾아...”
그러다가 “저는 육이오 때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로 나오면,
들을 것 다 들었다는 듯이 누가 한마디한다.
“임마, 융(6)이오 때라면 니 아부지가 조실부모했겠다.
4.19 때만 해도 니 엄마가 니 아범을 만나기나 했것냐?”
그렇게 ‘길게’ 나와도 승객들은 침착하게 기다리며 다 듣고는
‘냐?’ 다음에야 일제히 웃었다.
속으로야 “우씨~” 했겠지만, 꼬마 앵벌이도 삐직삐직 멋 적은 웃음을 뿌리며
핀잔준 아저씨에게로 가면, 그로부터 시작해서 몇 사람이 연필을 팔아줬다.
깎고 또 깎아도 심이 똑똑 부러져서 몇 자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던 저질 연필을.
그때는 그렇게 길게 말해도 웃어줬다. 한 번 웃으면 길게 웃었다.
아, 그 리모콘 때문에.
채널을 돌릴 때에 어른들은 1초~3초 정도 한 곳에서 머문다.
아이들은 0.5초 이내.
그 정도면 재미있는지, 거기 그렇게 좀 있어도 괜찮은 건지를 다 안다고.
한국전쟁 때쯤 얘기. 미군 신병들이 방공 훈련을 하면서 적기 식별 교육을 받았다.
화면에 1/15초 동안 비친 후에 그것이 야크, 미그기인지, 무스탕, F86기인지, 뭐 그런.
군인들은 “와~” 환호하고 “휘익 휙” 휘파람 불며 좋아했다.
1/15초라면 그것이 벗은 여인인 줄 아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때는 기술 문제로 영화 필름의 딱 한 토막만 보여줄 시간으로 잘랐겠지만,
실은 그 정도도 안 걸릴 것이다.
(다른 뜻인지는 알지만, ‘flash memory’라나,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인데)
그 ‘번쩍’의 효용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착오자.
저런 얘기나 들으려고 긴 시간 앉아있는 게 ‘쪽팔리는’ 일이 된 세대에
나는 어쩌자고 “축 늘어졌구나 흥~” 하고 있는가.
어려운 말 쓰면 듣지 않는다
대화하다가 상대방에게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하나 나오게 되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본다.
그것이 신조어, 제 세대에서는 쓰지 않던 말인데 듣고 보니 재미있는 말이라면,
그런 말 하나 주워 들은 것이 고맙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무슨 뜻인지 통 모를 말들이 몇 개라도 튀어나오면 “어느 쪽이 외계인?” 하면서
막막한 단절감이 사이를 갈라놓는다.
글에서도 그렇다. 사전을 찾아야만 알 만한 단어들이 두 개 이상 나오면,
그 글을 읽지 않게 된다. 필자의 해박한 지식과 어휘 구사에 경탄하지 않은 채 떠나게 된다.
“그래 너 잘났다” 하면서.
그때 나는 장용학을 읽었다. 다른 아이들이 김내성의 추리소설, 조흔파의 명랑 소설, 그리고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벌레 먹은 장미’ 같은 것을 읽을 때였다. 후에는, 그러니까 나중에 나온
이들로서 맞먹기에는 조금 윗대랄 수 있는 박상륭, 김승옥, 이청준 등을 읽었다.
(뭐 시시해 보이던 걸, 그때는.) (그런데, 어쩌자고 읽었는데 전혀 기억에 없는지...)
왜 나는 동생들 시켜서 빌려 보는 ‘밀림의 왕자’, ‘라이파이’, ‘날쌘돌이’가 재미없었을까?
윤동주는 그랬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라고 해서 쉬운 시는 아니다.
그리고, 시는 쉽지 않다고 해도 “그건 시니까...”라고 그러더라.
살붙이기가 민망한 언어의 절제를 사람들은 그러려니 한다.
나는 짜듯이, 다 쓴 치약 튜브를 짜듯이, 애써 뽑는데,
그 애씀은 어려움에 가려서 인정받지 못하더라고.
가르침은 쉬어야 하는데,
그 쉬운 가르침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 얻지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