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Communications) (2)
듣는 자도 말하기에 참여한다
옛적에 고갯길이 좁고 험하여 차 한 대나 겨우 지나갈까 그런 길에서는 고개 양편에서 헌병들이
워키토키를 가지고 일방통행을 유도했다. 워키토키는 한 쪽에서 말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들어야만 한다.
“여기는 까치 비둘기 나와라 오버.” “여기는 비둘기 오버.”
제 차례가 되면 말할 수 있지만, 듣는 동안에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고갯길을 지나는 차량들처럼 그것은 일방통행 식 진행이었다.
그렇게 받는 메시지는 수동적으로 접수하는, 말하자면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74년의 첫 인상파 전시회--그 이전 1863년에 이미 낙선전이 있었지만--는 미술사조 내지 문예사조에서만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달’ 이론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내디딤이었다.
거기에 그대로 있는 정물(靜物)이 아니라 방출하는 빛의 입자의 군무(群舞) 같은 움직임을 그렸다던가,
결국 빛(光)을 색(色)으로 나타내야 하는 어려움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내가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뭘 모르니까...)
이전의 회화는 성실하고 정확한 모사(模寫)이었고, 이상적 원형(原型)을 재현하려는 플라톤적
노력이었으며, 화가가 제시한 완성된 창작물을 관람객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하는 후대의 예술행위는 창조 작업의 사이클에 관상자(觀賞者)의 반응을 포함시켰다.
그러한 반응은 자극에 대한 기계적, 자동적 반응이 아니고,
미완성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보고 즐기는 참여에 의하여 비로소 완성시키는 덧칠이었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했으니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개칠도 할 것이고,
그런 ‘행위’는 없었더라도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위질, 뜯어고침, 더함, 비난, 칭찬, 충고, 계속되는 질문
등은 허용될 뿐 아니라 고무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 하여 보는 사람도 실질적으로 만듦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라도 그렇다.
경전과 전통, 전문가로서의 훈련, 부당하게 부여된 권위 등을 통해서
완제품의 단일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일군(一群)의 메시지들을 선택사양으로 제공하면,
청중은 자신의 선택과 적용(application)을 통해서 설교를 완성한다.
정책 제시도 그렇다. 어떠한 독재자의 절대권력으로서도 국민에 의하여
정책을 비롯한 많은 정치적 메시지가 어느 정도 조종됨을 방어할 수는 없다.
‘참여’ 정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기적이고 숙련되지 않은 소수 엘리트에 의하여 초기 행보가 어지럽게 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시민 참여’ 이외의 정치 형태가 남아있겠는가.
메시지에 의하여 청중이 조종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은 정도로
청중이 메시지를 조종한다는 얘기가 길어졌다.
그렇다는 얘기고, 이제부터는 My personal story.
전달의 방향
나는 잘 나가는 PD이었다.
‘히트 제조기’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뽑아내는 것마다 ‘걸작’은 아니었어도, ‘문제작’ 정도로 쳐주는 야박함에도 불구하고
흥행 자체는 늘 본전치기를 넘었다. Best seller는 아니어도 Steady seller인 셈이었다.
말하자면 직함 앞에 ‘중견 인기’ 정도는 붙는 전문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제작하는 것마다 시청률이 검토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것도 초기 몇 회는 잘 나가다가 점차로 저하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주(社主)가 날 호출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인책이라면 국장 선에서 처리되는 것 아닌가.
내가 뭐 거물급은 아니지만, 사장 면담쯤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주라면, 회장 너머 있는 하늘같은 분이라면... 감이 안 잡힌다.
도리 있나, 사표를 써 들고 갔다.
뵌 적도 없고, 배석한 이들도 없지만, 그저 그분이려니 하는 거지.
차를 권하고 몇 마디 형편을 묻다가 하는 말씀.
“사람들 좋아하는 것들만 아니고, 내가 즐기는 것도 하나쯤 있어야 되겠는데,
그걸로 광고 수입 올릴 것도 아니고 하니, 남겨두라고 조치했습니다.
그러니 용기 잃지 마시고...”
봉투를 내미셨던 것 같은데 챙겼는지도 모르고 정신 없이 나왔다.
허둥지둥 걷다가 복도가 꼬부라지는 모퉁이에서 돌아섰다.
허공에 대고 절하며,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예배/미사.
너무 예배자 쪽만 보고 있는 게 아닌지.
제단을 향한 시간이 더 많아야 하는 게 아닌지.
설교자보다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해야 되는 게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