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7)
죽음 뒤에 오는 것 B
올 날(來日)은 오늘의 연장이 아니고, 새 날이다.
새 날이기에 어떨는지 아직 모른다.
그것은 그래서 소망이기도 하고 불안이기도 하다.
불안하다고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오늘이 끝인데?
내일이 없으면 오늘이 의미를 잃는다.
아직 알지 못하는 내일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사람처럼’ 산다.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꿈꾸고, 일하고, 놀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약속하고, 내년 계획을 세우고, 십 년 후를 말한다.
내세(來世)를 믿지 못하겠거든 요청이라도 하라고 그랬다.
내세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음이 그 존재를 부정하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내세는 현세의 연장이 아니고,
현세의 보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현세를 살 만한 세상, 그래서 ‘다음’이 없어도 될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세는 (그가 믿는) 내세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창조)된 세계이다.
현재가 밀려가서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현재보다 먼저 있으면서 현재로 다가온다.
믿음이 없음은 가장 ‘나쁜 믿음’이다.
사람들은 그가 택한 믿음에 따라 그 믿음이 가르치는 내세를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는 내세는 오늘 살고 있는 세계로 다가온다.
신화적이고 구상화 같은 모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미지의 그대가 꼭 ‘지금’ ‘내세’를 ‘살고 있기’ 바란다.
선분(線分)은, 정의상(by definition),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이다.
생애를 출생과 죽음이라는 두 점을 잇는 거리라 한다면,
출생과 죽음은 생애에 포함된다(以內)고 그랬다.
그러나, 그 두 점은 또한 그 두 점 밖과 연결된 한계이다.
그 두 점은 어딘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직선 상에 있고,
선분은 직선 상에 있는 특정 거리(span)로 분할된 것이다.
(가장 단순한 설명의 모형으로 ‘직선’을 채택했을 뿐이다.)
떠나는 모습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 뒤에 오는 것’이 ‘어떨지?’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보통 편안한 마음으로 떠난다.
오늘 잠들고 나면 내일 깨어난다.
(그 내일이 오늘과 다른 날, 새 날이라는 것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렇게 아는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떠남은 분명하지만, 남겨두는 것이 있지만, 그것들과는 헤어지게 되지만,
떠남은 있어야 하는 줄 안다. 거부하고 앙탈한다고 남게 될 것도 아니고.
살아왔던 길을 돌아보니까, 좋은 데 찾아 이사도 하고, 영전되어 거처를 옮겨야 했고,
명승지라고 여행도 다녔고, 그렇게 갔다가는 돌아왔다. 집으로.
별로 배우지도 못한 여자였지만, 그녀(Phoebe Cary)는 예쁜 노래를 남겼다.
One sweetly solemn thought
Comes to me o'er and o'er:
Nearer to my home today am I
Than e'er I've been before.
옮기면서 조금 틀긴 했지만 우리말 찬송가에 실렸다.
저 뵈는 본향 집 나날이 가까워
내 갈 길 멀지 않으니 전보다 더 가깝다
더 가깝고 더 가깝다 하룻길 되는 내 본향
가까운 곳일세
기쁜 마음으로 혹은 안심하면서 ‘돌아가는’ 걸음이지만,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보법(步法)아 다를 수도 있겠다.
남아있는 사람들 형편에 따라 치를 것이니까,
떠나는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것도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그까짓 노래 하나 불러달라는 데야...
어떤 분은 “참 아름다워라”를 불러달라고 했다.
다른 분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날 부르소서”를 부탁했다.
김활란 님은 ‘환송식’에 ‘장송곡’을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 축제 같은 음악회가 따랐다.
김정준 님은 내 묘비에는 그냥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고만 적고,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량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를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다른 종교, 혹은 알려진 고동종교는 아니더라도 정리된 믿음을 가진 분들은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넉넉한 표정 지으며 가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