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Sunday (7)
그렇게 모인 적이 있었다
낮게 떴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그저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니까 고맙기만 한
그러면서도 하늘이 파랗다는 사실을 은폐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그렇게 한가로운 구름이었다.
덥다고 모든 것이 정지된 것은 아닌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일한다는 게 그렇게 힘겹지만은 않은
새참에 곁들인 농주* 한 사발이 고달픔 사이로 흥얼거림을 새어나오게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 멋 부리느라 그랬지, 酒는 아니었음.)
허리 숙이고 일하는 이들 보면 다들
할 말이 많아도 덮어두고
뒤안길에 가 있어도 튀어나오려고 하지 않고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아도 일부러 웃어주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서
“각자 해산!” 그랬다.
그때 마음으로는 잠시 후 “모여!”하게 될 줄 알았다.
어스름이 소리로 다가와서
저묾이 뚝뚝 떨어지는데
다들 어디 가 있을까?
잘들 있는가?
긁으면 더 가려우니까
가려워도 긁지 말라고 그러는데
그렇다고 긁지 않을 수도 없는...
그리움은 옴 같은 것.
거리 때문에 생기는 그리움.
끊고 나서 확인하는...
그것이 사랑이었던 것을.
시작할 때는 모르지
양배추 고갱이처럼 겹겹이 포개진 마음을.
그러니 사랑한다는 건
참으로 맹랑하고 굉장한 일이다.
펼쳐 보이면 갈피마다 속박이로 들어찬 슬픔이 있는데,
보이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더라.
그러니까 왜 아픈 표정 짓느냐고 묻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지나치고 나서 백미러로 보는 후회 같은 것.
저녁에 급습한 폭풍우
그것은 먹장구름이 아니었다.
강한 습기 같은 냄새도 다가오지 않았다.
노을진 하늘을 검정 천으로 덮을 때쯤
경고 없이 비바람이 몰아쳤다.
돌개바람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 쏟아 붓는 물뿐만 아니고
집 앞의 소화전이 터져서 위로 치솟는 물도 있었다.
정전이 뒤따랐고.
사람살이에서 비바람이란 무엇일까?
가장 좋아야 할 것들이
말하자면 사랑, 결혼, 자식, 일 같은 것이
가장 큰짐으로, 엄청난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하나씩 오는 것도 아니고
일단 탐색전 하듯 두드린 후에는
떼거리로 몰려오더라.
울지마, 슬퍼하지마, 네 견딤을 보여줘.
그것이 믿음?
신자는 그래야 하나?
불평하지 말라고?
아프면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전능하신 분께서 의로운 오른손을 내미사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며”는 주문이 아니잖아.
그럴 필요가 없는, 그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께서
같이 괴로워하기를 택하셨다면,
“나 괴로워요. 많이 아파요.”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
딸아이는 잠비아에 가있다.
내년에 수련의를 마치는데, 그 후 아프리카에서 사역할 수 있는지 맛보기로 가본 것.
리빙스턴을 기념한다고 도시 이름도 그렇게 지은 곳인데,
관광객을 위한 시설 몇 개가 ‘현대’ 모양을 하고 있지
그 병원이라는 건 리빙스턴 시절과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얘기.
“미국 의사가 왔으니까...” 하고서 전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내뺐다.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생명 다루기에 돌입한 셈.
“여기는 중세기 병들이 머물고 있어요, 어울리게도 19세기 이전의 치료법들이 함께 있고...”
“제가 빨리 습득한 것은 환자가 언제쯤이면 죽을지를 예견하는 거예요. 몇 시간의 오차도 없이
거의 정확하게 맞추지요, 그 때를.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의사라야 할 일도 아니고,
그냥 쳐다보고 만져주는 거예요.”
“어떤 아이가 죽었는데, 그 가족들이 굽실거리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거예요.
뭐가 잘못됐던가를 일러주어서라나요. 저들에게 그렇게 길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데요.”
심한 비바람을 경험하지 않는 삶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에게는 잘 다듬은 손톱이 부러지는 것 정도는 큰 불상사이리라.
대부분의 인생에게는 폭풍우가 있다.
오늘 아니라면, 내일 아니라도, 몰라 언제가 될지, 어떻든지 언젠가는.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고, storm after storm으로 이어지기도.
그럴 때 기댈 데가 있냐고?
He is a fellow-sufferer who understands.
He leads us by poetic persuasion, (not by coercive method).
(Alfred North Whitehead)
나를 이해하며 함께 아파하는 병실 친구 같은 분은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무슨 시인의 설득 같은 것으로 움직이게 하신다.
왕이시라는데,
그분의 왕관은 찢어진 꽃잎과 가시로 엮었다더라.
밤에 다시 들어온 불
그동안 촛불을 켜고 있었다.
딸이 어머니날 선물이라고 보내준 초를 쓸 일이 없었는데,
아깝다고 망설이다가 누구에게 줄 것도 아니고, 언제 써보겠나, 해서 켰다.
아, 그 장미향.
어둠은 불편하지만,
어둠 때문에 맛본 사치, 행복감.
자정이 훨씬 지났고
초도 가물가물해질 때쯤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컴퓨터도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우습지도 않게 금단 현상을 경험했다.)
손에 밴 향내가 아까워서 귀한 것이 곁에 있으면 비벼주고 싶다.
터진 수도관을 고치던 이들도 떠났다.
여러 시간 단수되었지만, 이제 물도 나온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그간 오해도 있었다.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라 사람을 지으셨다.
로봇은 죄를 짓지 않는다. 로봇은 순종한다. 로봇은 사랑할 수 없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기에 죄를 짓는다. 사랑한다.
사랑? 오해할 수 있는 권리와 이해하는 능력과 용서하는 자유로 빚어 가는 것.
남은 물음표 몇 개를 싸리비 같은 큰 느낌표로 쓸어버리고 자자.
보나마나 꽃밭은 엉망이리라.
이리저리 쓰러지고, 그 연하고 약하고 얇은 꽃잎들은 다 찢어지거나 흩어졌으리라.
처참하다고?
그 시듦으로, 마름으로, 쓰러짐으로, 찢어짐으로 인하여 감사한다.
단단하고, 질기고, 구겨지지 않는 조화가 아니라, 생명 주셨음을.
그 여리고 부드러운 사랑에게 찾아온 아픔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