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9)
사랑 없는 거리에서
[나는 시론(時論)을 유도하고 있지 않다.
그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바람은 있다.
이렇게 갈라져서 살 수는 없기에.
우파는 다가올 최악을 지적하고
좌파는 지나간 최악을 들춰낸다.
좌파는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으니까 버리자고 하고
우파는 있는 것마저 사라지면 남는 것은 없어지니까 지키자고 한다.
좌파는 우파의 부패와 도덕불감증을 공격하고
우파는 좌파의 무능과 대안 부재를 비판한다.
우파는 비 수혜자들을 무시하는 동안 암묵적 동조세력의 기반을 잃었고
좌파는 편가르기로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며 지지세력을 넓혀왔다.
아무 파도 아닌 사람들은 그저 잘 살기만 하면 된다면서
양쪽으로 조금씩 뜯겨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미워한다. 서로. 모두가 모두를.
00세력 준동과 00분자의 암약을 경계하면서 의심한다. 서로. 모두가 모두들.
뭐 이런 세상에 살고 있냐 우리는?]
사랑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죽음의 첩자로 포섭되어 암중 비약하는 셈이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삶의 특수요원으로 활약할 수 없을까?
생명의 주(The Lord of Life)와 죽음의 주(The Lord of death)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전쟁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징집되었거나 부역하면서 냉전 혹은 열전중이다.
대치상황이 길어지면 죽음의 세력이 승리하게 된다.
서로 죽이기로 하면 그것은 죽음의 주가 바라는 바가 아닌가?
그 자살 특공대라는 테러 전술에 생명의 세력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은 무적인가
그동안 죽음은 생명을 비웃었다.
생물은 한 때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기에,
결국 그것은 그가 삼킬 것이기에,
생명의 반짝임을 보면서 "귀여운 것, 메뚜기도 오뉴월 한 때라는데 재롱 많이 부리거라."
정도의 아량을 보이다가, 때가 되면 거두었다.
그가 거둔다는 것은 지워버린다는 뜻이었지만.
살자고 하는데 살지 못하니까,
죽음은 ‘죽임’이다.
그 죽임에 견딜 것이 없다면,
죽음은 무적인가?
죽지 않겠다고 하는 한,
죽음에게 이길 길이 없다.
죽은 후에도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죽음을 죽임 아닌가?
그러면 생명은 죽음을 부인하고, 죽음을 삼키는 것이다.
혹 부활이라 하든지, 영혼불멸이라 하든지, 내세라 하든지.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지만,
모든 생명을 삼키는 죽음의 그물이 찢어졌다면
그 찢어짐이 현재 작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물로서의 효용을 잃은 것이다.
죽었지만, 묻혔지만,
일어나셨고 갇힘에서 나오신 분이 있었으니,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 하였다.
맛보기라 하든지, 아니면 첫 해에는 그저 하나만 열렸다고 생각하든지,
그것은 올 것을 보여줌이고,
다음에는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그 이김을 상실한 것이다.
하여 일렀으되,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 55)
[나는 이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선언’만 한 후에 ‘이론 전개’나 ‘설명’ 없이 물러난다.
기독교인이라면 출석교회의 교사에게서 ‘설교’를 받으면 될 것이고,
다른 가르침을 받드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말씀’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것인가?
인생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현세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궤변들 중에 더러는 그럴 듯한 이론으로 돋보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시인들은 어차피 ‘현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달리기를 하면 일등은 따 논 당상(堂上)이다. 늘 혼자 뛰니까.
이승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이 하나 말고는 감(感)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면 뭐가 있다는 것인지? 살 만한 데인지?
옛적에 공중변소에서 보았음직한 낙서.
“지구여 멈추어라 뛰어내리고 싶다.”
(지구는 교외선 열차가 아니잖아? 다시 승차할 수 있도록 네 앞으로 다가올 것도 아니고.)
아무튼 못 말리는 시인들, 장난도 아니고...
나 좀 지구를 떠났다가
돌아와서 새로 시작하면 좋겠어
운명이 고의로 날 오해해설랑
소원의 반만 들어주고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떼어 내버리지는 않겠지
떠나면 어디론가 가지 왜 돌아오고 싶어하는데?
이 세상이 사랑하기로는 ‘딱’이거든:
여기 말고 더 나은 데가 있을는지도 모르겠고.
I'd like to get away from earth a while
And then come back to it and begin over.
May no fate willfully misunderstand me
And half grant what I wish and snatch me away
Not to return. Earth's the right place for love:
I don't know where it's likely to go better.
(Robert Frost, 'Birches')
그게 소년이 자작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늘 가까이 갔다가 땅으로 내려오듯이
장난이면 좋겠구나. 언제라도 반복할 수 있는.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유리 가가린은 지구 주위를 선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61년 4월 12일)
“여기서 지구가 잘 보인다. 아름답다. 기분이 매우 좋다.”
미국인으로 우주 유영(遊泳)을 먼저 했던(1965년 6월 3일) 에드워드 화이트가 성공적인 유영 후
우주선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고 한 말 좀 보게.
“지금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다.”
그럼 거기 아주 있을래?
다 돌아올 수 있으니까 폼잡는 얘기잖아.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은 세계이어서가 아니고,
이것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좋은 때도 있고, 아름다운 곳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주로 양지쪽에서 살고
다른 이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부르짖다가 볕 쬐지 못하고 간다.
그러니, 떠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된다고 그랬잖아.)
멈추어 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더 가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있지.)
그래도 가야지.
(말까지 가자고 그러는데?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서’)
숲은 멋지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든.
게다가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먼데,
그래,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고.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한 번 사는 인생이고,
내 앞길의 원근을 잘 알지 못하나 정해진 것이고,
좋은 길벗(소련 최초의 우주선에 붙인 이름 ‘Sputnik’은 여행길 동무라는 뜻) 만날 수도 있고,
사람은 곁에 있는데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오해만 쌓아갈 수도 있고,
그러다가
“오늘이 우리 둘이 말하던 그 날이 되겠네.”
To-day will be the day of what we both said.
(Robert Frost, ‘West-Running Brook’)
그런 날도 있을 것이고.
Robert & Elinor Frost (1911) 'West-Running Brook' 초판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