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10)

태양의 송가

 

(제목을 써놓고 보니 좀 그렇다. 
그 사람들이 ‘영명하신 장군님’을 두고 ‘태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거야...
원제가 ‘The Canticle of (Brother) Sun’이라면, 내 탓이 아닌 줄 알렷다.)

 

1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 3).

 

‘어린애 같은’이라는 뜻에 해당하는 영어가 두 개 있다.
‘childish’는 유치하고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뜻이 있는가 하면,
‘childlike’는 귀엽다든지 어린애다운 순진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돌이켜’ 어린애처럼 되라는 말씀은 단순함, 절대의존--제 힘없음을 알기에--, 숨김없음 등의
성품을 회복하라는 뜻이겠다.
(그 돌이킨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겠지). 


애라서 애다운 게 아니고, 어른인데 ‘아이 같음’을 견지한다면,
그것은 다시 얻은 천지난만(天眞爛漫)이고,
그것은 원초적인 소박함이 아니라 새로 얻은 순진(純眞)(second naivete)이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거나 수행을 통하여 얻게 되는데,
성인(聖人), 선사(禪師), (어느 수준에 이른) 예술가가 지니는 마음바탕이라 하겠다.

 

프랜시스(프란체스코) 성인은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다, 그는 어린이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 해야 옳다.)
그는 ‘순진’을 잃은 적이 없었다.

 

2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니 새나 꽃처럼 생명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을
형제나 자매라고 불렀다.  몸의 비천한 부분까지, 혹은 그가 처한 형편까지.
‘Sister Water’, ‘Brother Fire’, ‘Brother Ass’, ‘Lady Poverty’...

 

‘태양의 송가’는 또한 ‘만물의 찬양(Laudes Creaturarum)’이라고도 한다.
나는 마음이 틈을 얻을 때마다 흥얼거린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 저 은빛 나는 밝은 달...”


[실은 원문--움브리안 사투리를 이태리어로 옮긴--만으로는,
‘(피조물더러) 찬양하라’인지 ‘(그 피조물로 인하여) 찬양을 받으소서’인지 분명치 않다.]

 

 

 

 

찬송가에는 빠트렸지만, 원본대로라면 마지막 절에 ‘죽음 자매’가 등장한다. 
그것은 프랜시스가 별세하기 수 분 전에야 추가되었다고 한다. 
프랜시스, 그리고 안젤로와 레오 형제들이 불렀다고, 그러니까 그의 죽음 수 분 전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 4: 12).

 

    나의 주여, 우리 자매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찬양 받으소서.
    산 자는 아무도 그녀의 포옹을 피할 수 없나이다.
    화(禍)로다 용서받지 못할 죄 가운데 죽는 이들이여.
    그녀가 당신의 거룩한 뜻을 행하도록 발견한 이들은 복이 있도소이다.
    둘째 죽음이 그들을 해치지 못할 터이오니.

 

    Laudato si, mi signore, per sora nostra morte corporale,
    de la quale nullu homo vivente po skappare.
    guai a quelli ke morrano ne le peccata mortali:
    beati quelli ke trovara ne le tue sanctissime voluntati,
    ka la morte secunda nol farra male.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거나, 중세적인 영성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노래(찬양과 감사)가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도 잘못 된 것 아님.)

 

그렇지만...

 

3

 

생사대해(生死大海)에는 고락(苦樂)과 희비(喜悲)가 있을 것인데,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는 것 같아도
즐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많은 것 같아도
설움 때문에 죽어가는 게 아니고
괴로움이 죽이는 게 아님을 알고,
그냥 그것들이 생명이라는 유기체의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라 여기면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그것들도 없어서는 안될 것 같고,
그래서 그것들로 인하여 (감사까지는 아니라도) “그렇구나!!! 그래...” 할 수 있다면.

 

어머니의 치매로 인하여 찬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랜 실직으로 인한 궁핍과 모멸 중에서도 감사하라고?
평생 잔병치레하다가 마지막에는 족보 있는 병이 쳐들어왔는데 기뻐하라고?

 

그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할 말 없다.
(중량 미달이라 내놓기도 뭣하지만, 나도 뭐 실직, 실연, 가망 없는 죄책과 후회 등, 아휴...)
그냥 같이 우는 수밖에.
혹 레오나 안젤로 같은 형제가 곁에 있으면, 같이 노래할 수 있겠고.

 

그러면, 고통이 우리를 넘어트리지 못한다.
죽음더러 “야, 네 독침(sting)이 어디 있냐고?”라고 대들 수 있을 것이다. 

 

 

 


 

변명과 코다(Coda)

 

이렇게 축축 늘어질 것이 아니었는데,
시 한 수 읽다가 느낌으로 다가온 것을 떨치지 못하고 끌려오고 말았다.

 

1

 

수십 년 전 운전학원을 다닐 때에 ‘안전운전의 다섯 가지 수칙’이란 걸 듣긴 했는데,
기억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Aim high.
Aim high.
높은 데 이상을 두라는 말이 아니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Aim farther라 할까,
먼 데를 바라보며 운전하라는 말이다.  장애 상황에 미리 대처하라는.

 

일상은 긴급한 일들(urgencies)로 이루어졌다. 
발등의 불을 끄는 기분으로 사니까 늘 바쁘기만 한데,
그렇게 절박한 것 같아도 처리하지 않고 지나가도 그만이다.
긴급성의 주문을 다 들어주다 보면,
궁극적인 것들(ultimate matters)을 잘 준비하지 못한다.
꼭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때문에 못하게 되다니.

 

일상이 시시하다(trivial)는 것이 아니고,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궁극적인 관점에서 지금 여기를 살펴보고 돌보자는 얘기이다.

 

달리기도 전에 목표는 정해졌는데,
그 결승점에서 트랙(走路)을 돌아보는 감격을 그리며
한 걸음씩 힘차게 내딛자는 말.  

 

 

 

 

2

 

절명시(絶命詩)라 하기에는 장엄함보다 산뜻함이 주조(主調)를 이루는 셈인데...
아 맞아서 그렇게 되었나, ‘돌이켜’ 어린아이가 된 천상병의 ‘귀천(歸天)’을 좋아들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하늘에서 왔으니 세상 떠나면(別世) 하늘로 돌아가는 거지.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세상살이가 소풍?
아니잖아? 

 

삶은 경주이던 걸.
승자가 독식하는(Winner takes all).
그러니 죽자고 달려야 하던데.
(죽자고 달린다고 죽을 때까지 달린다는 건 아니지만.)


피크닉(行樂)이나 축제의 행렬(parade)이 아니고,
낙오자는 남 쉴 때에 더 뛰어야 하는 훈련이나 기압 같은 거던데.

Life is a deadly serious business.

 

3

 

그렇다고 노는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두레패들 일하면서도 노래부르다가
참마다 한 잔씩 들이키기도 하고
지겨워서 한 발짝도 더 떼기 어려울 때쯤 되면
잔치가 있더라.
나는 차리지 못해도,
웃말 김 영감 칠순이네, 면장 아들 장가가네 해서 다닐 데 많더라고.
  
밥은 채우는 것이고, 한 보시기 앵두나 카푸치노 커피 같은 입가심도 따르더라고.

 

“그런 거야, 다 그런 거지” 그러지만,
우리는 늘 놀랄 준비를 하면서 살잖아?
준비하고서도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갑자기 다가온 사랑에 가슴이 뛰기도 하고.

 

Wonderful은 full of wonder,
Beautiful은 full of beauty,
Joyful은 full of joy,
Hopeful은 full of hope.

 

좋지?  좋다고 그래.

 

                 

 

 

4

 

희망적(hopefulness)이란 말은 낙심, 환멸, 좌절이 원천 봉쇄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배제하는 것은 쓰라림(bitterness)과 냉소주의이다.
해봤자, 애써봤자, 꿈꿔봤자, 계획해봤자, 거둬봤자... 라는 말 쓰지 말자.
‘~나마나’ 라는 말 쓰지 말자.
밥 먹어도 다시 배고파지지만, ‘밥 먹나마나’라는 말은 하지 않잖아?

 

어렵지만 잘 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고, 뚫리거나 풀릴 것 같고, 이길 지도 모르는 때에,
그런 상황을 ‘희망적’이라고 부른다.

 

희망적이어서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고,
일어나서 걷기를 계속하면 희망적이다.

 

                                                                                   

 

 

5

 

왜 이리도 얘기가 길어졌냐고?
그거 그냥 잊고 지내거나 모른 척하면 안 되겠냐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하던데,
마지막이 엉망이면 전에 좋던 건 다 지워지더라고.  


품위 있게 살자면
‘끝’을 계획하고 관리해야 하더라고.

 

그래도 못 다한 말은 자꾸 생길 테니까 이 정도 하자.

 

신진대사(新陳代謝)란 죽어감 때문에 새 것이 들어섬이 아니던가.
그러니 살아감은 죽어감으로 가능한 거네.

 

죽음이 죽임이 되어 괴롭히지만 않으면, 죽음은 곁에 둘 만한 거야.

 

사랑하고 나면 잠이 오고 그런 거지.

졸리다.


누가 잠들 때에 내일이 없으리라 여기겠는가.


재견(再見, Till we mee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