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Sunday (8)

 

일요일은 주일(主日)인가?

 

예배당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순서지--광고와 교우 동정 포함-- 를
한자로 ‘週報’(주보)라고 표기했다가 혼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主報’라고 해야 한다고 우기자 동네 유지들이 모두 “옳소!”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 젊고 미국에서 공부한 분에게 눈빛으로 응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렇게 말했다.
“영어로 Sunday Bulletin이니까, 主報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아니, 어찌하여 ‘Sunday’가 ‘主’로 되었으며,
한 주일마다 받게 되는 광고 찌라시를 ‘Lord's Decree’로 안단 말이지?
그렇게 나는 내가 가르쳐야 할 이들에게 또 한번 불경죄,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예전에는 ‘Lord's Day Act’라는 게 있었다.
일요일은 거룩한 날이기에 상행위를 할 수 없으므로 개점할 수 없다는 것이
시행령의 골자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그것은 먼저 유대인들이 반발하였고,

다문화 사회에서 다수를 점유하는 불신자와 무신론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니,

이제는 그런 ‘법’을 지키는 도시가 거의 없다.

 

나는 아직도 주일(主日)의 정서를 고마워하고 좋아한다.
일요일 아침에 가족이 정장(Sunday clothes)으로 차려입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들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긴다.  저런 게 미국을 버티는 힘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 
목소리 되어 나오지 않더라도 늘 흥얼거리는 기분으로...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그러니, 이렇게 ‘Beautiful Sunday'가 꼬박꼬박 나오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유?

저 많은 이들의 신념이 보다 나은 세계의 순기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오늘날 ‘Evangelical(복음주의적 혹은 ~자)’이라는 말은 ‘극우’를 뜻하는 때가 많다.
그리고 왜 일요일만 主日--주님의 날--이어야 하는가?

 

 

너 고향에 가지 못하리

 

오늘 부른 노래는 “늦기 전에 다시 돌아와요”이다.
(그게 ‘님은 먼 곳에’와 같은 판에 들어있는 노래는 아니고.)

 

    If you tarry till you'll be better,
    You'll never come back.

 

    “좀더 형편이 나아진 다음에...”라면서 마냥 시간을 끌다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걸.

 

성공한 다음에 돌아가겠다면...  너 고향에 가지 못하리.

 

성공하면 고향엔 왜 가니, 대처(大處)에 머물지?
고향은 재러 가는 데가 아니잖아.

 

    젊어서 꽃 같은 오늘날로
    금의로 환고향 하옵소사

         (김소월, ‘집 생각’)

 

에이, 그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말 때문에 나는 가지 못했다.

 

(예전에 뱀을 잡으면 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
땅 냄새를 맡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던가...)

 

기진(氣盡)한 영혼이 흙 냄새를 맡고 재충전되는...
고향은 그런 곳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눅 15: 17, 20).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혼하자 어린 아들은 어머니를 미워했다.
의붓아비?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낚시를 갔다.
던지는 법을 몇 번 시범을 보이고는 해보라고 했다.
아들은 떨어진 데 가서 하겠다며 한참 내려갔다.
처음 던지는데, 미끼는 공중으로 날아가고, 바늘은 수초에 가서 걸렸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줄은 다시 감기지 않았다.
낚싯대가 부러질 것 같아서 무리하지 못하고, 걸린 데를 찾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넘어지고, 다 젖고, 줄은 더 엉키고...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버지가 다가오자 그 아들은 겁이 났다.
“아저씨, 죄송해요.  그만 실수를...  조금 기다려주시면 제가 줄을...”
아버지는 칼로 줄을 끊었다.
“얘야, 이 줄은 45전이면 산단다.  45전 때문에 하루를 망칠 수 있니?”
그 후 아버지는 아들을 끼어 안다시피 하고, 던지기, 감기, 등을 가르쳐줬다.
휙, 처르르~~~  “앗, 아저..., 아니 아버지, 여기 걸렸나봐요.”

 

풀지 못할 때는 끊어야 하기도.

 

 

 

 

딸은 잠비아에 가 있다.
보스턴 병원에서는 죽어나가는 애를 보지 못했는데,
거기서는 소아병동에서만 매일 두 명 이상씩 죽는다.
병원에 고치자고 오는 게 아니고, 그냥 죽기 전에 들려보는 것이다.
대기 근무(On call) 중 호출 연락을 받고 가보면, 사망진단서를 써달라는 것이다.
“왜 죽기 전에 나를 부르지 죽은 다음에야 부르냐?”고 그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게 대부분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얘기.
영양부족이라... 그건 먹이면 되고, 항생제를 제때 투입하기만 해도 거의 살 거라는 얘기.

 

수간호사가 협조를 안 하니까 모든 간호사들이 애먹인다고 한다.
IV 놓기, 혈액 채취, 등도 의사 ‘혼자’서 다 한다고.

 

딸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아빠는 내 성격 결함을 알지요?  늘 옳은 것들을 옳은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게 여기서 어떻게 보상받는지를 알면, 아빠가 “거 봐...”하며 즐거워하시리라 생각했지요
.


--
알다 마다.  너 그때 아빠더러 “안 돼” 그랬지. 휴가지 식당에서 와인 한 잔 시켰다고,
네 엄마와 함께 인상쓰고 그랬지.  그 정도 일탈(逸脫)의 유혹쯤 그냥 넘어가는 게 휴가 아니냐? 

그래, 거기서도 게으른 사람들을 야단치는 눈초리로 보고 그랬겠구나.


아무렴, 고소해할까?  그래서 한번 더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은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아서이고, 미국에서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여기서는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요.  늘 보면서 살아왔으니까...


그러면서 더 자라는 것이다.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며.

 

 

 

 

 

끝으로...

 

우리는 싸면서 좋은 것을 찾다가 인생의 대부분을 허송한다.
그런 건 없다.
가격이 가치를 말해준다.  (싼 게 비지떡.)

 

       “(너희가 구원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소멸될 것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룬 것이니라
” (벧전 1: 18, 19, 사역).

 

그러면 그 보혈(寶血)로 산 것은 얼마나 귀한 것일까?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값으로 따질 수도 없이 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몸, 목숨, 삶에 대해서 내가 열등감을 지니거나,
다른 삶을 무시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품질관리(quality control)는 그분의 일이 아니다.
살리시고, 자존심을 불어넣으시고,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할 수 있도록 힘주시는 것이다.

 

내가 하기를 바라시는 일을 수행함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