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죠 뭐 2
景物에 빗대거나 마음을 실어 詩를 짓는다기보다
자연과 사물에도 무슨 감정이랄까 그런 게 있지 않느냐
{무슨 物活論이니 그렇게 나아갈 것까진 없지만}
그래서 交感하기도 하고 매개로 하여 情을 실어 나르기를 부탁한다든지
그런 게 문학 아닌가?
음악도 그렇지, 명인에 의해 작곡되고 연주되니까 사람에게 의존하는 건 맞지만
작품이나 연장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생명력 같은 게 있어서
自體 發光하듯 감동을 전달하는 게 아닌지?
고흐의 그림? 화가는 간지 오래 되었는데 그림이 남아 전하는 것은 그림의 기운.
조물주가 세상을 지으면서 창조의 절정이랄까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 인간이 자유의지로 반역한다든지 죄를 짓게 되었잖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은 훼손되고 타락하였고.
모든 것들이 피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의지로 거역하든지
지닌 감정으로 사랑하고 싶고 그런 뜻을 전달한다든지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천지만물이 각자 느끼는 것을 사람이 잘 알지 못하니까
사람은 자기가 느끼는 것을 자연에 투사하고 자연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떠도는 바람만 아니고
흐르는 강물만 아니고
모든 것은 바뀌고 제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러면 삼각산의 암벽은?
풍화, 침식 아니더라도 밖에서 알지 못하는 내부의 변화, 게다가 미시물리학적 운동까지 들먹이면?
그것도 변한다는 거지.
발이 달리지 않아 거기에서 옮겨가지는 않지만
마음은? {마음 있을 것 같다니까}
마음은 짚시 짚시가 되어 떠나네~♪
어떤 아저씨 우람한 몸통에서 “춘심 ♥ 일편단심 영원불변”이라는 문신이 꿈틀거리더라고.
‘영원불변’이라는 말의 철학적 시사 같은 건 따질 바 없고
일편단심? 얘는.
자갈 묻고 오줌 부어 활석 되는 시간만큼 기다릴 수 있겠어?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냐고?
‘權不十年 花無十一紅’이라는 말을 몰라서도 아닌데
“따끈할 때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라”라는 좌우명에 따라 사는 이들
남우세스러워도 “내 목을 따 가, 가진 거라곤 29만원뿐이라니까” 버티기도 하고
萬古에 悠長한 강물을 5년 안에 막고 흐름을 바꾸겠다는 이의 治績 자랑 웃기지 않니?
뚫리겠지, 아니면 무너지니까
강을 어떻게 막아? 江은 흐른다.
서구사상사에서 최초 철학자 군에 속하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고 그랬지.
“모든 것은 변한다(omnia mutantur)”는 말, 그래서 다 사라지는 것이냐 하면
“아무 것도 소멸하는 건 아니더라(nihil interit)”는 말로 對句를 이루더라고.
그러니까 세상 다 변한다 해도
그 변화가 살고 있는 존재를 억압하는 폭군도 아니고 기피할 것도 아니라는 말.
죽지 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고 낳았으니 죽는 건데
線分의 길고 짧음으로 애석해하거나 장수 끝에 善終을 뽐낼 것도 아니고
어떤 식의 變態(metamorphosis)로 여기며 두려워하지 말자는 얘기.
어떤 형태의 믿음을 지닌 이라면 ‘부활’, 철학적 신념으로는 ‘영원불멸’ 같은 것을 견지해도 좋은데
변화-老化와 죽음을 포함해서- 자체에 너무 사로잡힐 것 없다니까.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그분께 의탁할 수도 있고
굳건한 반석 위에 서서 安心立命을 누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그 변화, ‘흐름’이랄까, 괜찮아.
그러니 싹 나고 꽃 피는 거겠지.
꽃이 진다고? 씨 맺을 것이고, 또 태어날 것이고.
봄물로 분 강에 가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알듯 모를 듯 엷은 웃음 한번 날려주시지.
그렇지 뭐.
심각 모드로 再入하지 않은 채 “그렇구나!” 하시게.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강’, <정든 유곽> 중-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강 1’, <그 여름의 끝> 중-
다만 우리에게 남은 모래,
큰물이 지나가고 잘게 부서진 모래
우리가 멎은 자리에서 강은 흘렀네
모래뿐인 삶 앞에서......
-‘강 2’-
또 봄이 와서 강둑에 풀이 짙었네
-‘강 3’-
이성복의 시 토막 내어 미안하네.
발려먹는 버릇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