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보고 싶은 건
어둠이 물러가는 때
갓밝이 직전이 가장 어둡다던가
제자들을 밤샘으로 가르치던 선생(rabbi)이 꼭두새벽이 되자 물었다.
“언제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는고?”
제자들 중에 하나가 대답했다.
“멀리 있는 동물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밤이 끝난 거겠네, 그렇지요?”
눈치로 보니 스승이 썩 만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청년이 대답했다.
“아직 강력하지 않은 빛살이 나뭇잎을 비췄는데, 어느 것이 감람나무 잎이고 어느 것이 무화과나무 잎인지
구별할 수 있다면 밤은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
그래?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스승이 원하는 대답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토론한답시고 입씨름에 언성이 높아지고, 문자 그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똘똘이가 생도 대표가 되어 아뢰게 되었다.
“이제는 스승님께서 생각해두신 답을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제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 후에 선생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때에 그 눈동자에서 형제, 자매, 그리고 네가 보이면 아침이 밝았음을 아는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나 네 모습이 비춰 보이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아직도 밤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제 어슴새벽이 되었고...
동트고 좀 있으면 사람들의 눈동자와 그 눈동자에 비친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으리라.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위에 실린 윤동주의 시 ‘자화상(自畵像)’은 그가 22살이 되기 전에 쓴 시이다.
아직 ‘자기’가 미워질 것도, 가엾을 것도, 그리워질 것도 없는 나이인데...
맞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가 보인다고 들여다보냐?
고인 물에 드러난 제 모습이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흐르는 물에는 아른거리며 비칠 테니까,
주제파악이 제대로 안 되면 예쁜 줄 알 것이다.
하여 나르시스는 물에 뛰어들었단 말이지.
네 눈동자에서
밤이라고 네 눈의 반짝거림을 못 본 건 아니지만,
해돋이 후에는 네 눈동자에서 내 모습을 보겠구나.
미워져 돌아갈는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
뛰어들지도 몰라.
물가에는 가지 말라고 그랬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예까지 와서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할 거리에서 떨고 있다.
더 나아가면 빠질 것이다.
돌아서고는 같이 죽지 못함을 후회하며 죽어갈 것이다.
면경(面鏡)
참빗으로 빗어 쪽 짓는 할머니께 여쭸다.
“할머니는 거울도 없이 잘 하네?”
“에구, 늙은이가 숭업게(흉하게스리) 세꼉(거울, 石鏡)은...”
한참 후에 혼잣말처럼 보태셨다.
“난 세꼉 본 적 한번도 읍서...”
할머니는 곰보.
그야 그때 살아남은 이들의 반쯤은 다 얽었지만...
그래도 고우셨는데, 평생 한번도 거울을 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하긴 놋대야에 비칠 때 “그런가보다” 하셨겠지.
윤동주나 기형도보다 두 배를 더 살고 그 위에 또 보태가고 있는 늙은이가
할배라고 흉보는 소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거울을 본다.
가만 있자, 간만에 들어볼까 했는데 Ravel의 ‘Miroirs’가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