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가고
견딜 수 있겠니?
서울에서 온 소식은 ‘춥다’고 그랬다.
아니 더위와 장마를 불평할 때가 언젠데... 이제 선선해졌는가?
여기는 화씨 100도(섭씨로는 38도쯤 된다), 주차한 자동차 안은 120도쯤 된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안쓰러워 한마디 던졌다.
“견딜 수 있겠니?”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해줄 수 없어서 얼른 외면하고 떠났다.
장미.
지고서야 그 아름다움을 안다고?
그건 다시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찬사이겠네.
더러 봉오리를 맺기는 하지만 피기 전에 겉 꽃잎이 타버리는 더위이다.
[겨우 겨우 버티는 모습을 차마 사진에 담지 못했다.
최상의 모습만 기억하면 되지.
늙은 영자가 ‘전성시대’를 말할 때에 고개 끄덕여 주라.]
살인 더위
저 위에 달아 매놓은 사진...
그게 무슨 택배회사의 창고도 아니고, 우편행랑이 아니고, 그럼 뭘까?
Body bag. 시신을 담은 자루(負袋)들이다.
사진은 투산(Tucson, Arizona)에 있는 시체 안치소 내부이다.
시원해졌다니까, ‘납량(納凉) 특집’은 아니고...
“아메리카 좋다대...”라는 바람이 들어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에 들어오려고 한다.
(옛적 나폴리 민요 “저 멀리 아메리카로 떠날 맘 간절하다”라는 게 있었지.)
그렇게 밀입국을 시도하는 이들은 안내책--얘들이 아주 못된 조폭 행동대원--을 따라
리오그란데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른다.
그러다가 탈수와 열사병으로 쓰러지면 끝이다.
(차마 사진으로 올리지 못하나, 황야에 방치된 짐승 잔해 같은 것들이 사람의...)
그렇게 ‘꿈의 땅’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 이들,
들어오긴 했지만 냉방장치가 없는 헛간에서 지내다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너무 많아서,
정부는 냉동 창고를 빌려서 일정기간--연고자를 기다리는-- 안치한다.
미국이 뭐라고...
불법체류자의 형편은 그렇다 치고...
노인이나 허약자, 운동선수도 까딱하다가는 ‘더위’ 때문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아이를 깜빡 잊고 차안에 두고 내렸다가 얼마 후 와보니 죽었더라” 라는 얘기가
뭐 놀랄 만한 것도 아니다. 자식 잃고 형무소 가고... (형량까지 안다, 흔한 사건이니까.)
나는 왜 어이타가...
여름은 가고
그 ‘Lononderry Air’라는 슬픈 노래는 Irish(愛蘭人) 다음으로는 한국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리라.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flowers are dying [or, all the roses falling]...
그런 거지.
여름이 가면 꽃은 사라진다. 국화 정도가 남을까...
보통 변색, 탈색된 잎을 보며 가을을 느낄 것이다.
여기서는
서늘해지면 (아직은 아니지만)
꽃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살아남은 것들은 한번 힘차게 만세 부를 때를 맞이한다.
장미, 참으아리(clematis) 같은 것들이 한번 더 핀다.
차마 걷지 못했던 토마토, 고추, 수박 같은 것들에게서 몇 개 더 건지기도 한다.
여기라고 죽을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지.)
봉선화는 겨울을 나고 다시?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봄날까지 언 땅에서 기다릴 것 없다.
약간 “용용...” 무드를 곁들여...
(쥐구멍에 볕들 날 있고, 열사의 땅에도 땡볕이 손속에 인정을 보일 때가 있고.)
여름은 가고 꽃은 다시 피니~
꽃 때문만은 아닌데, 가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