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Sunday (9)
(간만에 ‘설교’하라고 해서...)
마음만 앞서 가지 한낮에는 아직도 눈알이 익을 정도이지만, 밤으로는 선선함도 느낄 만 합니다.
뜰악을 채운 달빛을 흐트러뜨리며 걷다가 감기같이 스며든 가을 병이라고 할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얻으셨습니까?
“오메 단풍 들것네”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재미없는 동네지만,
‘공치기에 딱 좋은 날씨’ 이외의 의미도 찾아보시지요.
가을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은 힘든 작업도 아니고 한가한 이들의 시간 보내기도 아닙니다.
그것이 의식의 뒷마당에 평토장한 이들에게 일일이 비석을 세워 주고 싶은 뜻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굳이 회향과 복고의 퇴영적 정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만들어낸 말이긴 하지만) ‘갈맘(秋心)’을 수심(愁心)으로 읽지 마십시오.
겨우살이 ‘걱정’으로 가을을 망치지 마십시오.
갈맘은 “세상이 다 그런 걸...”을 변명으로 삼으며 이(利) 때문에 의(義)를 버렸던 세월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이 모습으로는 안 돼”라는 자각으로 모처럼 순화(醇化)의 자정작용(自淨作用)을
발동케 하는 것(ignition key)입니다.
가을에 모처럼 ‘생각하는 것’은 할만한 ‘일’입니다.
김삼의당이라는 이조 여인이 ‘청야급수(淸夜汲水)’라는 한시를 지었는데,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맑은 밤에 맑은 물을 긷다 보니까
우물에 달이 비쳐 샘처럼 솟아라
말없이 난간에 기대어 섰더니
오동나무 그림자를 바람이 흔들어라
‘그림자’--어느 동네에서는 ‘그리메’라고도 함--나 영상(映像)이라고 하면 ‘실체가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만지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고 해서 ‘허깨비’로 여기지는 마십시오.
있기(存在) 때문에, 있는 것을 드러내려고 음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려지기도 하고 희미해질 때도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달밤에 상앗대 질을 해보셨는가요?
뱃전에서 그림자가 부서진 후에 흔들리다가 배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면
달과 산 그림자가 다시 의연한 모습으로 자리잡지 않습디까?
없는 듯 싶으면서도 있는 것이 분명히 나타날 때까지 믿고 바라십시오.
신구약 성경을 통전적(統全的, holistic)으로 보는 사람들은 ‘예표(豫表)’라는 말도 사용하지요?
장차 올 것의 표는 그것 그대로 이미 있는 것입니다.
“가장 복된 이 날은 하늘 안식 표(emblem of eternal rest)로다”라는 가사도 있지만요.
그래요, ‘높은 하늘’이라는 상투어보다는 ‘하늘 깊숙한’이라는 표현을 채택해서 말이지요,
“하늘 깊숙한 곳에서 편히 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부지런히 달리기만 하던 분들도 이 가을에 좀 쉬십시오.
“은퇴한 다음에” 혹은 “아이들 출가시키고 나서”라고 연기하지 마시고 오늘 쉬십시오.
나무 밑을 찾아가시겠습니까? 좋지요. 쉼(休)이란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댄 모습입니다.
그런데요, 산 나무에 기대는 것은 ‘깜빡쉼(休息)’이고요,
죽은 나무 밑에 있음(安-지붕 아래 아낙이 머묾)이 아주 쉼(安息)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라는 가사가 생겼는가.
양포라는 분이 쓴 시 한 수를 끌어오겠습니다.
늙은 말이 솔뿌리를 베고 잠들어
꿈속에서 천리길을 가네
가을바람에 나뭇잎 지는 소리를 듣고야
깜짝 놀라 일어나 저녁 노을 속을 가네
굳이 견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백리요 지켜야 할 약속도 있는 걸.
그동안엔 뭘 했는데, 저물 녘 갈 길이 이처럼 먼고?
잘 놀았지요. 춘흥에 겨워 눈 좀 붙이겠다고 누운 게 그렇게 오래 되었는가?
봄날이 그런 거구나.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 분다고 꽃이 지네.
그게요, 당신이 무엇을 했던지,
허리 한 번 피지 못하고 일했던지, 낮잠 잤던지, “나비야 청산 가자”로 놀았던지,
지난 시간은 날아가 버린 것이라니까요.
찬송가 가사를 빌리자면,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지나간 세월이 행운유수(行雲流水)이었다면, 육체의 남은 때가 천천히 가겠습니까? 그나마 어떤 길일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죠.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서 늘 무방비상태이었습니다.
널어놓은 옥양목 빨래 위에 오물을 끼얹듯이 사랑은 우리를 유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땅 위에 평안 없고 기쁜 일을 몰라도 주 예수의 참사랑을 내가 이제 알았네.
그리고 그분은 성인성녀의 사랑을 갈구하시며 “내가 목마르다”하셨습니다.
‘갈맘’은 ‘갈 맘’이고요, ‘가고 싶은 마음’인데, 난데없이 이런 찬송가가 들려오데요.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저 천당 복 얻을 자 회개하라
주 성신도 너희를 부르시고 뭇 천사도 나와서 영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