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인가 (2)
최근에 지인 한 분이 별세해서 상가에서 기도회를 가지게 되었다.
시편 23편을 암송하자고 그랬는데, 끝까지 따라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수십 년을 ‘교회 문화’에 젖어 살았을 텐데, 그 짧은(전 6절) 시 한 편을 암송하지 못한다.
(어쩌면 유행가는 그리도 줄줄이 나오는지?)
시 몇 편을 외워 필요할 때에 술술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능금
김춘수 님 가신지 한 해 되었고,
(웬 “샤갈의 마을...”은...) 가을이 되니 그의 시 ‘능금’이 생각난다.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그다지 흉 거리가 아닌 철이니까...
가려워서 긁는 사람에게
“긁지 마, 긁으면 더 가려워져” 그런다고
안 긁을 수도 없고,
그리움이 병이 된 이에게
“그리워하지 마, 그리워할수록 더 아파” 그런다고
그리움을 털 수 있겠냐고?
어쩌지?
추파(秋波)
가을은 무엇으로 먼저 올까?
높은 하늘? 나뭇잎의 변색? 여인의 옷차림?
물빛일 것이다.
추파를 던진다, ~보낸다, 그런 말들 하는데,
그게 어쩌다가 ‘환심사려고 치사하게 아첨 떠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을꼬?
교태를 부린다는 뜻이 있지만,
그거야 ‘미인의 맑고 아름다운 눈길’을 보고 끌린 사람들이
책임을 여인 쪽으로 전가하려고 그렇게 사용한 것이리라.
그윽한 눈길은 “내게로 오라”가 아니고
“당신께 가고 싶습니다”라는 뜻 아닌가?
아 실은 가을철에 잔잔해진 물 위로 파르르 떠는 고운 결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바람 방향에 따라서는 물길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혼동될 때도 있다.
조선 땅이라는 게 빈약한 듯 제대로 솟지 못한 동산들과
사납지 않게 흐르는 물들로 꾸며지지 않았던가.
그 여인의 추파를 어찌 설렘 없이 맞받으랴?
내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