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인가 (3)
가을은 갈기를 세우고 달려드는 맹수처럼 사납게 다가오지 않는다.
진종일 허리 꺾고 일하다가 고단해진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듯
타박타박 걸어온다.
아미 고운 아낙이 뒷동산에 올라가 벌을 내려다보다가
제 서방이 가르마 같은 논길로 들어선 걸 확인하고는
정지로 내려와서 상 차리고 찌개를 불 위에 올려놓는다.
선한 눈매의 영감이 집에 닿을 때쯤 되면 보글보글 끓겠고,
다시 데우고 어쩌고 할 게 없으니까.
가을을 그렇게 맞이한다.
조금 바쁜 걸음으로,
기대에 차서.
겨우살이(過冬) 걱정은 나중 문제고
저녁이 좋으면 되니까.
가슬
가을은 가슬에서 시옷이 탈락된 말.
아직도 가을걷이(秋收)를 가리켜 ‘가실하다’라는 말을 쓰는 데가 있다.
‘갓’은 끊는다(切)는 뜻. 이삭을 베거나 열매를 끊어 거두는 계절이 가을이다.
좋은 철이네.
올벼라면 추석 전에 거둘 수 있겠다.
햅동부 섞어 밥 지으면 맛있겠다.
식품점에 가면 포대에 이름은 ‘이천쌀’, ‘경기미’ 등으로 붙였는데,
캘리포니아나 루이지아나의 미국인 농장에서 거둔 것들이다.
삼십 년 넘게 그걸 먹다 보니까,
이제 와서 그 옛날 고향의 안골 논에서 거둔 쌀로 지은 밥이 어땠던가는 잊어버렸다.
햅쌀이라...
그때 외 증조모께서 되게 심심하셨던가보다.
“야야, 이리 온나 보자.”
(뭐 내게 볼 일이 없으실 텐데...)
“묵은쌀이 낭기요[난가>낫다] 햅쌀이 낭기요?”
(어휴, 또 시작...)
“아무래도 햅쌀이 낫지예.”
“아이다, 묵은쌀이 낫다.”
(내가 이런 짓에 왜 휘말려야 하는가, 나가려는데 뒤통수에 대고...)
“묵은쌀이 낭기요 햅쌀이 낭기요?”
(으그, 미쳐라...)
“묵은쌀이 낫다 해야겠제?”
“아이다, 아무래도 햅쌀이 낫지, 안그라나?”
(청개구리 게임인지 뭔지, 뭐라 하든 그 반대로 나올 텐데, 그게 재미있나... 난 그럼 가요.)
“야야, 게 좀 앉그라.”
반짝이는 감의 비밀
가게에서 사오기는 했는데, 아직 떫다. 덜 익은 걸 따서 그런 게지.
젊은(어린) 사람이 감을 어디 즐기는가, ‘큰’할머니께나 인심 쓰자.
“할매, 감 좀 드시소.”
나갔다가 들어오니 부르신다.
“야야, 이거 니 묵그레이.”
그런데, 그 감이 참 이상한 것이,
몇 시간만에 반짝반짝, 탱탱, 야들야들, 말랑말랑이 되었다.
“할매, 우예 감이 이리 된기요?”
“이래이래 핥지 않았나...” (시범을 보여가며)
내가 정말 못 살아...
‘아름다운 가을 모임’
어느 분은 좋은 벗들과 함께 ‘노날모임’에서 즐긴다고.
노날? 아무렴 ‘노가리 까는 날나리 모임’이겠는가, ‘노래의 날개 위에’라고...
참 좋은 이름, 부러운 모임일세.
해서 생각난 건데...
대부분의 재미 한인교회에서는 노인들의 모임을 ‘소망회’라고 그런다.
어느 교회에서 교회 안내를 영어로 표기하면서 ‘소망회’를 ‘Hope Society’이라고 옮겼는데,
이를 본 양인(洋人) 목사님이 웃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Retired Men's Club’이라고 부른다”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은퇴자 구락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카드놀이 정도이다.
효도의 나라에서 만들어 놓은 노인정에서 하는 일이 장기, 윷놀이, 고스톱이듯이 말이다.
사람은 놀이 없이 살 수 없고, 놀이의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놀이’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길일까?
‘소망회’를 영어로 옮기자면 아무래도 ‘Beautiful Autumn Club’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다시 우리말로 옮긴다면 ‘아름다운 가을 모임’이 되겠다.
가을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과일이 무르익도록 햇볕을 몇 일만 더 허락하소서.”
그것은 단순히 건강하게 사는 날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하염없는 소원이 아니다.
시장에서 파는 과일은 소비자에게 운송되는 시간을 고려하여 덜 익은 채로 따기에 맛이 들지 않았는데,
뒤뜰에서 토마토라도 재배하여 한여름에 재미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제대로 익은 것을 나무에서 따먹는 맛을.
당신은 우리 삶의 나무에서 잘 익은 과일을
그분의 상에 제물로 드리는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가지 끝에 까치 밥이라고 남겨 두었던 감을 무서리 내리고 한참 후에 따먹던 맛을 기억한다면,
우리 인생의 깊은 가을, 귀밑에 서리가 내린 후에도 간직하셨다가 요긴하게 쓰시는
그분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과일이 익을 만치의 몇 일’을 더 벌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사람 맛을 제대로 낼만치의 날 수’를 더 받고 싶은 것이지,
불편한 몸을 더 끌고 가려는 부질없는 꿈이 아니다.
아 참, 날더러 아호(雅號)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것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험한 세상에서 막 불러도 괜찮을 이름 하나쯤 따로 가져도 괜찮겠다 싶어...
“‘모모’라고 불러주십시오.”
(실은 대꾸하기가 싫어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아무개(某某)’라는 뜻으로 뱉은 것이었다.)
“네? 호호, 무슨 연예인이나 애완견 이름 같네요. 모모야~ 호호, 재밌어라.”
‘모모’(慕暮)가?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가...
그런 마음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