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인가 (4)
무슨 '과거 청산'이니 그런 역사적 사명에 열올리셔야 어울릴 만한 분도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그랬잖아요?
해서, 쓰다 보니 그만 길어졌는데,
불특정다수에게 보내는 공지사항 같은 거니까,
굳이 읽으실 건 없어요.
평안하시기를.
그만 떠들려고
그동안 입 좀 다물고 있었어.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지.
태풍 '카트리나'가 지나간 자리가 예상보다 훨씬 험했거든.
그 참상을 목격하면서 역사와 동떨어진 사적 애상(哀想)을 표현할 염치가 없었던 거지.
"여기 미국 맞아?"라는 말...
현장에서 당한 사람들만 아니고, 뉴스 미디어를 통해서 바라보는 자국인들,
고소한 듯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도 않는 외국인들까지 하는 말이다.
이 자연재해와 늑장대처에 대해서 할 말 많다고 남들 하는 얘기 옮길 것도 아닌데,
그저 요만큼만 얘기하고 지나갈게.
미국 참 좋은 나라더라.
민병대가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이고.
민간 차원--교회 등을 중심으로--에서 그 많은 봉사자들이
구호와 지원에 이만큼 신속하게 투입되고, 지속적으로 헌신하고,
자투리 시간이나 부스러기 의연금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제 삶의 자리와 가장 편안하고 사적인 공간과 가능한 모든 자원을 내놓는 것이
어디 쉽겠냐고? 그만큼 동원할 수 있는 사회나 국가가 많겠냐고?
딴 이유도 있었어.
컴퓨터에 저장된 것이 싹 날아간 거야.
토마스 칼라일의 '불란서 혁명사' 같은 얘기 할 것도 없지만,
상실감은 크다.
어쩌겠나...
그리고,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거든.
'지구는 하나다' 해도, 잘 연락될 것 같지 않은 곳으로.
블로그 폐쇄 같은 특단 조처가 금방 실행되지는 않을 거야.
식물인간, 유명무실--아 뭐 언제 이름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로 한참 남아있겠지.
긴 여행으로 돌볼 수 없다고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은 아니고,
내 집이니까 언제라도 돌아오면 들어갈 수 있겠지.
관리인을 따로 둘 형편이 아니니까,
가끔 들러 거미줄도 치우고, 짐승들이 똬리 틀지 않도록 군불도 지피고 그러겠지.
원기를 회복하면 묵정밭을 갈 수도 있겠고.
그저 그런 마음이라는 뜻...
(폐가이니, 이제 찾아오지 말라고, 주절주절..)
사랑을 시작하는 때
어디가 길목인지 출몰지역인지도 모르니까 그냥 헤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무슨 "감 잡았다" 그런 말 있잖아?
이쯤일 것 같은데, 이제 때가 됐는데...
무슨 근거도 없는데 확신으로 다가오는 느낌 알지?
약속은 없었지만 마주 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맞닥뜨릴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해후인 듯 하기로 하고,
그러고서는 목적을 가지고 배회하는 중이다.
내 마음을 침략군이 빨리 점령하라고
유치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항거불능의 깃발을 흔들고서
몇 번이고 연습한 항복 선언문을 다시 외고 있는 중이다.
"허락 받지 않고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의 가슴 한 쪽을 벤 것이 그리 큰 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도 책임을 물으신다면 어찌 하오리까?"
뻔하다.
깔깔 웃을 것이다.
뭐라고 한 마디 더하지 못하고 맥없이 울먹거리다가 돌아설 것이다.
응, 이게 뭐지, 내가 왜 그러지?
뒤늦게 핀 꽃에 대하여
뭐라고 말 좀 해야 할 것 같지만
남들은 제 철이 아니라고 픽픽거릴 것이고
나도 뭐 쑥스럽고 그렇다
(박재삼, '무언으로 오는 봄')
통 자신이 없다,
나이 이만 하니까.
해서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정도로 부탁하고는,
싫다면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고 떠날 테니까 그건 염려 놓으라는 단서까지 붙인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헤어진다고 그럴 것 없어
아니 시작하기도 전에 떠남을 말하지 말아.
만난 이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사랑하면서 헤어져야 하는 게 고통 중의 고통이라지만,
그런 줄 알고 살아온 거지,
그럴 것도 같다는 거지,
헤어짐에 대비하며 만나는 건 정치꾼들 사는 모양이지,
보통사람들은 나중은 어떻든지 '영원'을 말하잖아?
하긴 그래.
'사랑은 영원히'라는 말은
바로 그 사랑이 가실 줄 모른다는 얘기는 아니거든.
들꽃 따서 모으던 작은 손처럼
땀나거나 싫증나면,
아 뭐 더 예쁜 꽃들이 나타나면,
버릴 수도 있는 거야.
애들이 그런다고 너도 그럴 수 있는 것 아냐.
이제 네게 무슨 '더 예쁜 꽃'이 "짜잔~"하며 나타나겠니?
있으면 있는 것 지켜. 가꾸고.
불편하더라도 웬만하면 같이 가.
나 같지 않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사랑할 틈이 없는 거니까.
평범을 멸시하는 남자와 비범을 증오하는 여자의 갈등 같은 걸로
더 이상 피곤해지지 말자.
그 뽕짝 같은 건강한 유치함으로
인생을 튼실하게 가꾸고,
단순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휘저음을 굉장한 춤사위나 되는 듯이 칭찬해주며,
순수하게 서로에게 몰두하자는 얘기.
이제 찾아야 한다면
이제 뭐 진솔 찾게 됐냐?
일부러 구멍 뚫고 탈색시켜 해진 듯이 보이는 것말고
때가 되었기에 적당하게 닳은 청바지 있잖아?
그런 것...
'옛 양으로 고운 자태' 찾을 것 없고,
지금 있는 그대로 봐줄 만한 것.
다 그렇더라.
만나고 끌렸으면 다 저 같은 거니까,
그러니까 가까워진 건데,
나중에 "과연 이 만남이..." 하면서 따지고 그러지 말라고.
내 얘기 재미없을 때쯤 되었으니...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마종기, '비 오는 날')
그리고 묻지 말아.
"너 내 속에 들어와 본 적 있어?
아니, 가까이서 본 적이 있냐고?
내 어디가 좋다는 거지?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는 거지?"
자꾸 묻는데,
싹싹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린다고
욱대기지 말라고.
'무엇 때문에'는? 그냥 사랑한다는 데야...
브라우닝 부인이 그랬지, 당신이 나를 꼭 사랑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라고 그러지 말라고.
I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ought
Except for love's sake only. Do not say
(... ...)
(Elizabeth Barrett Browning, 'Sonnets from the Portuguese, XIV')
자꾸 의미를 물을래?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 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김춘수, '서풍부')
[가라는 얘기 아냐. 그리고, 가려거든, 인사할 것도 없고.
"Good-bye is not worth while!"
(Thomas Hardy, 'Without Ceremony')]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그림 그리기 편하라고 그런 거지,
그 별엔 꽃이 하나밖에 없었을까?
('작은 왕자' 얘기.)
꽃이 많다고 해서 다 제가 돌볼 것은 아니다.
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일수록
여럿이 봐 주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보고 지나간다고 꽃이 좋을 게 뭔지?
그러니까 관계를 맺어야 할거라.
피고 지고... 그 사이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 나비가 다녀갔는가,
가슴이 부풀어오르다가 아랫배가 무거워졌다.
아기를 만든다는 것은 종족보존의 의무이지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니잖아?
"너는 내 꽃"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예뻐짐,
그런 게 사랑 아닌가?
여럿이 지나가며 예쁘다고 말한 건 소용없고,
한사람의 칭찬 때문에 설렘이 가시지 않는 게 사랑이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루가 일생과 맞잡이라니까.
그 '애수(Waterloo Bridge)'라는 영화, 전쟁통이어서만 아니고,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루에 일생 살기'라면 '하루살이' 아닌가?
하루 망치면 일생을 망치는 거니까,
오늘 잘 살지. 사랑하며.
찬이슬이 서리로 바뀔 때쯤 되어
"들에 핀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할 것 없다.
마음 쓰이는 것은 '나의 꽃'이지.
그게 그렇더라, 가는 이 있고 남는 이 있고.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남은 이도 갈 것인데...
And I shall hear, though soft, your tread above me
And all my grave shall warmer, sweeter be
For you will bend and tell me that you love me
And I will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Frederick Edward Weatherly 작시 'Danny Boy')
아, 그건 뭐 노래이고...
그렇지만...
"정 주고 가지 마" 그래도, 가는 건 가는 거니까,
그때 가서 뭐라고 할건데?
Charles Kingsley 목사는 그의 비명(碑銘, epitaph)을 미리 준비했었다.
Amavimus, amamus, amabimus
(We have loved, we do love, we shall love.)
사랑하였노라, 사랑하노라, 사랑하겠노라.
그럼 됐지?
사는 게 힘들게 여겨지는 건 사랑이 잘 안될 때인데,
'관계'가 부담이 될 때인데...
난 그대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대의 사랑이 평안하기를 바라네.
사랑이 의무라는 건 잘못된 말이 아냐.
의무로 여겨지도록 기쁨이 없었던 게 문제지.
난 그대가 기쁘기를 바라네.
가냘픈 희망의 심지에
사랑의 기름이 넉넉하게 부어지면 좋겠네.
안녕
'안녕'이라는 말 뒤에 따로 붙이지 않더라도
'다시 만날 때까지(Till we meet again)'가 따르는지는 알겠지?
양인(洋人)은 시인조차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If I should meet thee
After long years,
How should I greet thee?
With silence and tears.
(George Gordon Byron, 'When we two parted')
아, 이쯤 되어야 멋들어지지.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우리 다 알지만, 그게 그 말 아니겠어?
꿈엔들 잊히리야~~~
그럼...
(소풍은 즐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