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단장(短章)
한때는 푸르렀던 내 안의 것들아
누추한 것에 발이 묶여 빛을 잃은 것들아
실낱같은 정신의 한끝을 물고
크게 날개를 저으며
새들은 돌아온다
(조은, '새들은 돌아온다')
나 지금 갯가에 마른 풀로 서 있다.
날지 못한다.
안 되는 것이냐?
그럴 때 되어
생기 잃고 빛 바랬다면
타락한 것이냐?
살던 데말고 낳은 데로 옮겨가야
죽을 자리 찾은 셈이냐?
발은 묶였는데
상체는 바람받이였으니
몇 번이나 쓰러졌다.
그렇게 뉘어진 채로 살았다.
나는 새들 보기만 했다.
한 놈이 내려 쉬어갈 때
붙잡지 못할 줄 알았다.
깃털이나 몇 개 떨어트리고 가라고 그랬다.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직이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
(조지훈, '풀밭에서')
어떡할까?
뭘, 그냥 그렇게 있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붓겨
풀은 눕고 드디여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그래
그렇게 누워라.
그런데 말이지,
조선 시인들은 왜 휘트먼(Walt Whitman) 같은 이들처럼 건전 가요를 부르지 않지?
같은 '풀잎 단상'인데 말야.
자 그럼 맞을 놈 하나 더 대령하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정현종, '견딜 수 없네')
뭘 견딜 수 없다는 거야?
가는 건 가는 것.
변하는 건 변하는 것.
그렇게 되도록 지음 받은 것.
이젠 버릇처럼 영원을 약속했던 일들이 부끄럽다.
가냘프고 여린 것,
밟히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에게
웃는 모습으로 남으라고
"김치~" 그러지 않았다.
(박광진 그림, '갈대' 연작 중)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조지훈, 풀잎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