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친일 청산
몇 주 아버님과 함께 지냈다.
넉넉함과 익숙함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렵기만 한 사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머님이 계셔야 하는데...
기미 만세 사건 전 해에 태어나셨으니, 살아 계시다면 88세이시다.
외할아버지께서 가족을 돌보지 않으셨기에 어렵게 자라셨는데,
그래도 학교를 마치신 후에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와 보통학교 국어교사를 하셨다.
온통 미쳐 돌아가는 나라에서 해방되고 60년이 지난 마당에
새삼스레 '친일 인사 명단 작성'이니 '역사 바로 잡기'니 하며 소란을 떨고 있다.
적을 잡을 흉기가 부메랑이 되어 제가 다치는 웃지 못할 희극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도 버젓이 공직을 지키지만...)
지난 대선과 관련되어 순수가 의심되는 동기로 시작한 '운동'이
정치적 이용가치 때문에 스러지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떤 형태의 '청산'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정 때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자손이 당시 공직에 있어서 괜찮았던 인사의 자손을 색출하여
욕보이자는 것이 민족 정기 함양과 국운 흥성에 큰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운 좋게 도망갔다가 돌아온 치안대원이 부역자를 색출하여 학살하던 일은 '현장'의 흥분 때문에
있을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를
부르던 날의 감격을 알 길이 없는 젊은이들이 무슨 철천지원(徹天之寃)을 갚을 것도 아니면서
이제 와서 책략에 놀아나는 것이 안타깝다.
얘기가 다른 데로 빠져서 헤매게 되었는데, 시골 보통학교에서 국어교사였다는 전력은
'일본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인지?
아버님만 해도 그렇다. '성서조선' 사건과 동경 간다 교회에서의 필화 사건으로 인하여 미결수로는
가장 오랜 수감 일수를 기록했고, 몽양 선생을 숨기거나, 독립 운동 기금을 보낸다던가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그런 일들에 대하여 공적으로 언급하며 "나 이런 사람이외다"라고 내세우신 적이 없다.
해방 후에 왕년에 악명 떨치던 고등계 형사 가네야마(金山) 경부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내 앞에 무릎꿇고 빌기에 민망해서 혼났다."라고 가족에게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실은 먼 훗날 '친일'로 몰리게 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
일제는 안재홍, 장덕수, 등 저명인사들과 더불어 약관인 아버님도 '대화숙'에 합숙하며 소양교육을 받은 후에
"황국 신민의 도를 다하라"고 국민을 계몽하는 일에 동원하려고 했다.
이리저리 빼는 바람에 관계당국의 속을 썩이던 차에 해방을 맞으셨다.
아버님과 함께 시국 강연을 하러 다녀야 했던 분은 아버님이 빠지는 바람에 짝이 맞지 않아
혼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분은 아버님께 고마워했는데, 나중에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고 훈장도 받고 그랬다.)
이런 얘기 다 쓸데없는 것인데, 나라꼴이 저렇고 보니,
이제 와서 과거를 들추자는 사람들의 속내가 괘씸해서 혼자 떠들어본다.
물론, '매국노' 집안이 대대로 잘 사는 꼴 보기가 편안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애국인사 내지 그들의 자손의 원통한 사연이 구전(口傳)으로 흐지부지 사라지지 않도록
'바른 기록'을 남길 필요는 있다.
'역사 바로 잡기'가 무림 흑도의 '암수'로 이용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얘기다.
아, 어머니. 참으로 고운 자태에 많은 재주를 갖추셨는데,
목사의 아내로 사시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시지 못했다.
함석헌 선생이 좋아하셔서 가끔 들리셨는데, 어머니의 상쾌한 도마질 소리가 나면
"아, 할아버지 밥 들러 오셨구나."라고 생각했다.
하루에 한끼 드신다는데, 한번에 워낙 많이 드시는 '一食'이었다.
육남매 나눠 먹을 양이 줄어들던 슬픈 날.
늙었나보다. 시시한 얘기가 질질 끈 것을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