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냥 있는 이
버려진 석등
돌보는 이 없이 오래도 남아있다
거기 있는 동안은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파손 당하면
보물 관리가 소홀했다고 한참 시끄럽겠지
사랑하거나 사랑 받지 않고도
그렇게 견딜 수 있구나
그러길래 돌인가
돌이라도 바위는 아니어서
사람 손을 탄 것이라서
정에 물들지 않았다 할 수 없고
바위라도 그렇지
(흠, 고산이 그러기는 했네만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하야 프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회 뿐인가 하노라")
거기 그냥 있다고
속마음도 늘 그대로인지는 어찌 알겠는가
한 님에게 연서 오천 통을 보내고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 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석등도 발이 없어서 그렇지
가고 싶은 데가 있을 것이다
팔이 없어서 그렇지
안고 싶은 이가 있을 것이다
(여행기 중에 바탕체는 각각 고산의 '오우가',
청마의 '바위', '00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