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참는 아내 고맙게 여길 것도 아닌 것이
여간해서 비가 안 오지만 한번 왔다 하면 쏟아지더라는 친구의 불평.
It never rains but pours.
(크산티페에 대해서는 "천둥 뒤에야 소나기가 따르지 않던가"라고 했다더라마는.)


그렇다.
여기는 비 한번 왔다 하면 쏟아 붓는다. 


빗발이 장대 같으니 장대비. 

(굵기도 하다, 작달비, 작살비.)
세차게 내리니 맹우(猛雨), 강우(强雨).
짧은 시간에 줄기차게 쏟아지니 호우(豪雨), 폭우(暴雨).
보통 천둥을 동반하니 뇌우(雷雨).
기세가 험해도 오래 가는 건 아니니까 소나기(白雨, 驟雨).
끄느름하니 오래 오지는 않더라도 좋기야 하겠는가 궂은비(苦雨)임에는 틀림없다.


나다니기 불편하다고 싫다 할 수는 없다.
벼농사 짓지 않으니 목비, 못비를 기다릴 것은 없지만,
비 없는 동네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야
무슨 비라도 단비(甘雨)이고, 제 때 내리는 비(膏雨)이고, 고마운 비(慈雨)이다.
어디 농사꾼에게 만이랴 헉헉거리는 만물을 축여주는(澤雨) 꼭 필요한 비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랑비도 내린다.


가랑비(細雨)라면 어느 정도로 내리는 걸까?
가랑비라도 가릴 것(雨裝, 雨備) 없이 나가기는 그렇다.
삿갓과 도롱이, 우산, 비옷을 갖춰야 하는 판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런가 하면...
"가랑비야 내 얼굴을 더 세게 때려다오"라고 하더라마는,
가랑비는 후비고 찌르고 때릴 정도는 아니고,
더 세기를 바란다면 가랑비에게 부탁할 것이 아니다.


이슬비(fine drizzle, 絲雨)는 가랑비보다 더 여린 비이다.
[가랑비가 이슬비보다 더 센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가랑비의 '가랑'은 '가루'처럼 분분하거나 '가랑이'에서처럼 갈라져서 내려서가 아니고,
안개를 뜻하는 옛말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뭐 그런 것이 있었다.
(많이도 리메이크했네, 아휴~ 장사익까지...)
보슬보슬 내리는데, 봄비인데,
그래서 움돋고 꽃피던데,
봄비에 울기는 왜 울어?


 

그런 것말고 '봄비'라는 제목으로 한결 괜찮은 노래로 변영로의...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여기서는 이쯤 되었다고 해서
"시몬, 너는 좋아해 낙엽 밟는 소리를?" 청승 떨 것도 없는,
"흠, 더위가 이젠 갔구나" 정도로 안도할 만한 때인데,
올해는 이상하다, 아주 소조(蕭條)한 분위기로 빠져들었네.
옛적 같으면 서간문 작성한다고
"시하(時下) 추랭지절(秋冷之節)에 기체후(氣體候) 일향(一向) 만강(萬康)하옵시고"라는
판에 박은 표현을 시원찮은 솜씨로 한자를 그려 넣는 때이구나.


그런데, 무슨 비가 그러냐?
이런 건 좀처럼 없었다.
'추적추적'이 가을비 내리는 꼴로는 어울리는 표현이겠는데,
이건? 
하하, 는개(煙雨)구나.
오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미 촉촉해졌다.
"하하~" 할 수 없게 되네.
무슨 기분이 이렇지?
차라리 빗발이 시원하게 쏟아지는 게 낫겠네.
은죽(銀竹)이라 부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