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김춘수 시인 일주기를 맞으며--

 

공원이 넓다고 해야 구석구석 뻔한데
무슨 자욱길이 남았다고
오늘 아침엔 애두름 넘어 호젓한 숲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들꽃들과 마주쳤다.


이젠 괜찮은 식물도감이나 인터넷 영향으로
웬만한 이들도 들꽃들을 척척 분별하고
제대로 이름 불러주지 못하면 무식쟁이 취급하더라.
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벌개미취, 산국, 감국... 정도 알아야지
들국화라는 꽃은 없다고 그러더라 마는
그럼 서울 사람이라는 사람은 없냐?


그리고 그 이름이라는 게 어차피 기호이고
'십팔번' 아가씨나 다를 게 없는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을 담아
내가 그에게 따로 붙여주지 않는 한
이름이 어떻든지 달라지는 게 없는데,
(그렇잖아,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뭐 그런 말 있지?)
공식명칭으로 불러준다는 게 뭐 그리 익히기 어려운 재주라고?


천 개의 눈으로 살피시며
천 개의 손으로 돌보시는 님은
이름을 묻지 않고 중생에게 베푸시는데,
이름 좀 몇 개 주워섬긴다고
별나게 자애로운 척하지 말라고.


그대에게 당신으로 불리고 싶은 나는
그대에게 이름을 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피~ 그거..." 하겠지만,
맨 날 밥과 김치 먹는 사람들이
아는 노래 나오면 그런다니까.

 
몰라도 좋으면 그만이지만
아는 것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그랬잖아?


 

    3할은 알아듣게
    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
    말을 해가다가 어딘가
    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 묶어두게


        ('시인' 중에서)


 

후배를 지도한다고 할까 시인을 꾸짖는 말을 수용한다면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게 될 텐데,
저들이 하는 말을 아는 척 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두게.
    훌쩍 뛰어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시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품을 줄이게')


 

아침에 본 그 꽃들 말이지
또 찾아가게 될까?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 그렇게 찾아가면
이름이 필요하게 될까?

아니야, 보는 동안에는 부를 것도 없는데
어두워지면(夕) 불러야(口) 알아들으니까
이름(名)이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진 때
부르는 것이라고.


다시 보고 싶다.
가까이 두고 싶다.


가면 얼마나 가겠냐
시들고 말 것이다.
그 안에 정이 들까?
최소한도의 지속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기에 사랑이 없고
이름이 없다.


이름 부르지 않고
같이 지내더라도
기억하자면
이름은 있어야 한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떨림만 보면 '대여(大餘)'라 할 수 없네.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맴싸한 냄새가
    코를 맴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강우' 중에서)


 

    내 귀에 들린다. 아직은
    오지 말라는 소리,
    언젠가 네가 새삼
    내 눈에 부용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불도 끄고 쉰다섯 해를
    우리가 이승에서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그것,
    새삼 내 눈에 눈과 코를 달고
    부용꽃으로 볼그스름 피어날 때까지,
    하루해가 너무 길다.


        ('대치동의 여름' 중에서)


 

그렇게 같이 오래 살아야 하는 거구나.


 

에그, 무슨 '무의미'는?
그만 하면 다 알 만 한데.
이름 있고 의미 있어
꽃으로
사랑으로
남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