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짐
도시락에서 흐른 김치 국물이 책갈피에 번졌지?
또?
구강 노트에 파카 잉크가 번졌다.
세수하다가 코피 나면 대야 물에 붉은 실들이 퍼져나갔다.
번짐이 없으면 그림도 없겠네.
울림이 없이는 음악이 없듯이.
그는 왜 따라 웃지 않았을까?
그는 왜 따라 울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도 웃었을 게야.
나중에라도 울었을 게야.
번짐은 스미면서 일어나니까
속으로 퍼지는 거니까
네 눈으로 단층 촬영할 수 없는 것이야.
워낙 속 깊은 사람은 나타내지를 않더라고.
번짐은...
번짐은 엷어짐이야.
그러다가 없어짐이야.
그냥 없어지는 건 아니고
스며들고 만나 어울려서
새로 태어남이야.
제 빛을 세우며
자기를 지키겠다면
사랑은 정말 어렵겠다.
그럼, 퍼짐이고 말고.
보이지도 않고
있다가도 사라지지만
알 만한 이는 알더라
그렇게 끼침을.
그러니까 유곡(幽谷)의 난초라도
서럽지 않겠네.
번짐은 다가옴(薄)이기도 하지.
박모(薄暮), 박명(薄明)이라고
살며시 깨금발로 다가오는 기세.
딱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없는 때.
빛인지 어둠인지
삶인지 죽음인지.
다 빠져버리고 바라고 사위고 흩어졌으니
슬플 것 같은데
그냥 참는
아니 뭐 괜찮은
그런 번짐.
(토론토 북쪽에 있는 Algonquin Park)
마주보지도 않고, 나란히 앉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지만,
같은 쪽을 보니까, 한 배 탔으니까...
뭐 산불처럼
그렇게 맹렬하게 번지는 것도 있다.
그럼, 올겨울에 조류독감 조심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