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울 것도 없는

--윤동주에게--


 

아침부터 왜 이리 고단한가
산책길에 잠시 앉아 쉬게 되었다.


단풍은 떨어지고
물빛은 이제 붉음을 걷고
비색(翡色)을 회복하였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박재삼)
를 떠올리며 비감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마른 잎들이 바스락거리고
버들가지는 심하게 흔들거리고 있다.
왜 늘어져 흔들리면 흐느낀다고 그럴까?
Weeping willow?

 

                                

 

뻔뻔한 걸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와 닿지 않는 걸.
 

수줍음 타는 건 그대 문제지
겨 묻었으니 부끄럽다고 그러면
우리를 뭐로 만들자는 겐가,
거름통을 뒤집어썼다고 꾸중하는가?


이 좋은 날 구름 한 점 찾아볼까 하는데
이거야 어디 고개 쳐들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앞은 막혔으니까,
위라도 바라봐야 하는데...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길' 중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서시' 중에서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참회록' 중에서


 

아 참 내... 그러니 어쩌자고?
한 갑자를 산 사람은 이제 어쩌란 말이냐?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중에서


 

슬프기는 하다만
이름 가진 게 부끄럽긴 하다만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별 헤는 밤' 중에서


 

그래 일단 죽어야 하는가보다?
까짓 이름은 덮어야 하는가 보다?
(줄곧 그렇게 살았는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


 

            

 

 

 

그거였구나.
그게 문제였구나.
하긴 약관을 지나고서
인생을 얘기할 건 아니었고,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살았어.--
작업이 쉽고 제품은 잘 나오는데
명품인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얘기?


그건 뭐 그대 말처럼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한겨울 지난 다음에야 알아보겠지.


그런데 말이야,
시란 뭐 그리 어렵게 나오는 것인가?
산고 없이 쑥 빠지는 아이처럼
그렇게 내지를 수는 없는 건가?


허투루는 아니지만
옛적에 이규보는 쭉쭉 빼내던 걸.


천재라면 꽤 괜찮은 걸 낳을 게고
범인이라면 저 닮은 걸 낳겠는데
다 그저 그만한 데다
제 자식인 줄 알면 귀한 거니까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거지.
 

비교할 건 아닌데
윤동주는 '자기'라는 덩어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쩔쩔맨 것 같아.
(기독교인이라 그런가?  무슨 원죄의식 같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自畵像'

 

 


 

 

그거 뭐 그럴 거 있나...

 

    不對靑銅久    거울 들여다본지 오래 되니까
    吾顔莫記誰    이젠 내 얼굴도 알 수 없는 걸.
    偶來方炤井    우연히 우물에 비친 모습을 보니
    似昔稍相知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녀석이잖아.
        
        --'炤井戱作(우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그러니 자칭 '白雲居士'라 했을 것이다.
와도 반갑지 않고 가도 그립지 않은 구름이라...     
 

 

오래 앉아 있었다.
뛰는 사람들 보기에는 좀 그렇겠지만
아침이라 나도 좀 그렇다만
흰 구름이 바쁨과 더불어 한가함을 다툴 건 없지.
("白雲爭肯有忙閑", '烟寺暮鍾')


 

일어나자.
더 걷자.

 

                    

 

 

소신공양(燒身供養)이나 좌탈(坐脫)할 것도 아니고
내가 산 자취 모든 게
등신불(等身佛)로 남을 게야.
국으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넘침이란 없으니까).


 

불면 꺼질 것 같고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것들과 마주치면서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미태(媚態)를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치기로.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은 거기에 있고
슬프다고 그러지 않아도
슬픔은 가지 않지만
알 듯 말 듯한 웃음 지으며
관계를 지속하기로.


편지 보냈다고
답장 기다리는 건 아니다.


 

P. S.
쉽게 씌어진 시라고 쉽게 읽혀지는 시는 아니지?
그러지 않았나, 시는 쉽게 씌어져야 한다고.
그건 부끄러울 것도 없는 거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