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종류
가친께서 사십대 후반에 하셨던 말씀--
네 가지 종류의 고독이 있다고.
(1) 피하여야 할 고독:
(없으면 좋은 것. 다 아는 얘기.)
(2) 만들어져야 할 고독: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하셨다.
참된 시인이 되려면 자기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내려가는
‘고독에의 하강’이 있어야 한다고.
(3) 견디어야 할 고독:
릴케의 ‘젊은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오셨다.
(응, 릴케는 왜? 일본어판 다이제스트를 읽으셨나...)
그리고 ‘로미오와 쥴리엣’도 끌고 오셨다.
“이 무서운 일막은 아무래도 나 혼자서만 당해야 한다.”
(4) 소망의 고독:
동포에게 버림받은 예레미야가 하나님도 자신을 내쳤다고 비통해하다가
최후로 “나는 당신에게 내 모든 호소를 맡기나이다”라고 했던 말,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언급하셨다.
크리스천이라고 하여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나, 고독 가운데에서
오히려 소망이라는 근원적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
끝으로, “모든 고뇌에서 구원하는 자, 빠른 죽음이냐, 긴 사랑이냐?” 라고 말한
일본 시인 생전춘월(生田春月)은 바다에 그 몸을 던져 빠른 죽음을 택했음을
지적하셨다.
마침말: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량없는 긴 사랑을 발견하니
지금에 만족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이 긴 사랑 안에서 살지 않으렵니까?”
오래 사셨다. 긴 사랑 안에서.
향년 91세.
나는 종부성사를 집례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몇 차례 임종을 지켜봤다.
젖배 부른 아기가 물었던 꼭지를 놓고 만족한 표정으로 잠들듯 하는 모습도 보았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끌려가듯 하는 마지막도 있었고,
내키지 않아 하다가 결국은 편안치 않은 얼굴로 수락하는 타협도 있었고,
단말마의 고통으로 벌떡 일어나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다.
가친은 천 까지는 아니 되었는지 몰라도 줄잡아 수백 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셨다.
기독상조회가 없던 시절에는 염도 자주 하셨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낸 지 이십 년.
그런데...
만들어져야 할 고독, 견디어야 할 고독, 소망의 고독은 어디로 갔는지
혼자 있기를 몹시 두려워하신다.
잠시도 사람이 곁에서 떠나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그리운 음성이 들리지 않는 걸까?
아들의 기도를 받고 잠드셨다.
내가 아흔이 되어 혼자 살게 된다면... (그렇게 되겠냐만...)
이런저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