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凡庸記)

 

헝클어진 일정, 기다리던 만남이 어그러짐.

그렇게 시작하는 바람에 미루던 일을 하게 되었다.

넘어진 김에 땅에 떨어진 돈을 주울 수도 있는 거니까.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일 끝나면 만나자는.

세 시간 반이 남았는데 뭘 하지?

어떻게 기다려...


기다림이 기쁨이던 시절

그리움이 슬픔이지 않아도 되던 때

외로움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서

외롭더라도 서러울 이유가 없던 날

Gone are the days...

 

지금은 안 그렇다.

 

되게 아프고 나면

약해지니까.


혼자 있기가 힘들다.


둘이 있던 때에는

무를 수 있나

떨어지고 싶었고

여럿이 북적거리던 때는

쟤들 언제 떠나겠지

은근히 기다려졌고

막상 둘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갑자기 혼자가 되고 말았다.


나 때문에 혼자가 된 사람을

먼저 생각해줘야지.



어떻게 기다리지?

아무 꽃을 건드려도 뭐라지 않을 들꽃 천지에서처럼

아무 책이라도 뽑아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덥고 붐비다보니

그 재미도 별로이다.

기다리는 건 싫다.


흠, 게다가 약속시각에 대오지도 못하는구나

그랬는데...


솔 냄새 나는 친구 오랜만에 보니 좋다.


종로 뒷골목을 요리조리 쏘다니다가

‘귀천’에서 아픈 다리 쉬려는데

웬 할아버지가 기타 들고 등장하여

“You are my sunshine”을 부르는 바람에

쫓겨나왔다.


별로 중요한 얘기 나누지 않았다.

중요한 얘기였으면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일이 아니라 좋다.

친구는 놀이를 같이 즐기는 사람.


어그러져서 잘된 하루라고 하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주) 범용: 자장면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얼굴 같음.

       범용기:  그런 사람의 특기할 만하지 않은 시간 보냄을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