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1)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예전에, 그러니까 CM Song이라고 해야 지금 귀로는 그저 그랬던 때이겠는데,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으로 나오는 아이스크림 광고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주고 싶은 마음과 먹고 싶은 마음이 겹쳐지지 않는 게 문제.
부모 사랑을 자식이 알아주겠냐고 그러면 알아듣겠지만,
그런 것 말고 또 있지?
있어.
영접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신의 짝사랑이라든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경우라도 그렇더라.
사랑은 주는 것이라지만
그렇다고 받음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주는 만큼 받기는 어렵거든.
질, 량, 깊이, 열기, 강도의 차이가 분명하던 걸.
또 그렇더라.
준다고 다 받는 게 아니니까
준다고 그러고서는
거절의 상처만 안고 돌아가기도 하고.
미안하지 않다고?
Erich Segal이라고 몇 번이나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그렇지만 영 맘에 안 드는 이가 쓴
‘Love Story’가 영화로 나온 지 35년쯤 됐는가.
“What can you say about a twenty-five year old girl who died?
That she loved Mozart and Bach. And the Beatles. And me.”로 시작했다.
그건 뭐 기억할 것 없겠고...
소름의 씨앗은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that you’re sorry.”이었다.
안됐다,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게 사랑이라고?
서운해 할 것도 없다?
그러면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은 내용물은 문제 삼지 말라는 얘기?
그것이 사랑이기에 다 괜찮다는 말?
사랑한다면 용서를 빌 이유가 없던가?
사랑은 그렇게 당당한 건가?
다 주고, 다 해주고
그러고 뭘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한 게
그게 사랑 아닌가.
그러시더라.
이 나이 되어 듣기는 참 거북한데,
뭐라 위로해드리기도 그래서 그냥 들었는데...
“너희들 자랄 때 제대로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
내 참, 무슨 논다니를 주워 와서 데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남자도 그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할 말은?”이라는 설문에 대해서
‘미안하오’가 ‘사랑해요’를 압도하더라는.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한 게 아니고
(못되게 군 게 회한이 된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사랑해도 미안한 건 마찬가지.
아니 사랑하기에 미안한 거지.
그럼 정호승의 노래 하나 들으시고...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뭐 지금 시비 걸 무드는 아니지만...
산에는 길이 없는가?
그게...
잘 나아가다가 막히는 데가 나오고
막힌 줄 알았는데 끝까지 가보니까 열리더라는
그런 얘긴가?
하긴 그냥 신작로 내지르듯
되는 일이 있겠냐?
사는 게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몇 번이고 고비가 있더라.
산 너머 산이고.
그 산 다 넘은 것 같을 때쯤 되면
그래서 ‘고생 끝 행복 시작’은 아니고,
얼굴 묻고 우는 이가 길 막고 있는 바람에
타넘지도 못하고 가랑이 사이로 빠질 수도 없어서
도리 없이 부둥켜안고 울더라는 얘기다.
미안하지.
많이 미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