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몇 권

 

 

잘 빠진 詩는 시시하다.

시시하면 滋味 없겠네? 그래 맛없어.

맛없는 게 좋은 거네.

물맛 좋은 건 맛이 없어 좋고, 맑은 공기도 그렇지 뭐.

좋은 것을 좋아한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

맵고 짜고 단, 그 독함으로 사람 끌어 맛집 열전에 들어간 것들이 좀 많아야지.

몸 생각하며 꼭 오래 살자고 그러는 건 아니네만, 이제야 뭐 맛으로 먹을거리를 고르겠나.

“하늘이 주신 거니 온 것 통째로 더할 것도 꾸밀 것도 없고 그저 감사하며 모시겠습니다.” 그러게.

聖體에 잇자국 내기도 죄송하니 꿀떡 삼키거나, 잘 안 되면 혀 위에 놓고 사르르 녹이듯.

 

그런데 시 말일세, 맛없는 시

심심한 건 괜찮지만 시시해서야 되겠는가.

의미심장하지 않다면 예쁘기라도 해야 되잖겠는가?

한눈에 “아 참 美하다” 그래야지

“들은 것도 없는 게 흉하기까지...”로 흉잡히면 그건 아니지.

 

꾸미라는 게 아니고 단순하면 좋다는 얘기.

나이 드신 시인들 저녁기도(晩禱)랄까 보면 짧아지더라고.

복잡할 것도, 모를 것도 없고.

그런데 말이지, 그거 더 쳐내도 되겠던 걸.

숱 없는 머리 늘어트리긴.

 

좋아한다고 숭배하는 건 아니니까

예쁜 것 더 예뻐지면 더 좋으니까

더 좋아하자고 조심스럽게 꺼내는 얘긴데...

미흡한 듯해서 붙이는 뱀발(蛇足)말이지, 그거 떼어내면 안 돼?

 

글자 빽빽한 책, 학술서적 아니라 소설이라도 들여다보기에 눈 아파서

더러 시집 들게 되는데

만화책도 아니고 두 번 볼 게 아니라서 신간 몇 권 받아보게 되었다.

 

시인도 자라는 거니까 “에이, 걔...” 하며 제낄 건 아닌데

그리고 아주 괜찮은 시인이야 떡잎부터 알아보고 “우와~”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으 창피해라, 왜 이런 게 주문 리스트에 들었을까” 하는 걸 보면

젊은 시인들의 덜 익은 과일.

戀詩集? 연애편지는 전달할 둘 사이에는 의미가 있겠으나 여럿이 같이 읽을 시는 아니지.

시나 노래는 私的인 게 아니거든.

 

列外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게 없으니까.

 

 

 

이기철 시인.

뭐 나보다 조금 더 사셨고 좋아하는 분인데

사랑하는 이에게 야단친다? 그런 게 아니고, 가까운 줄 알고 소감을 忌憚없이?

 

왜 그러신 적 있잖아요?

“후일에라도 나는 나를 인생파 시인이라고 불러주기를 염원한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길이다.”

인생파? 뭔지 모르지만 좀 우습기도.

그래도 이건 아닌데 싶은 글씨로 갈겨놓은 ‘茶禪一味’니 하는 扁題보다야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얼마나 좋아! 詩化와 化肉이렷다.

 

대체로 시인들은 교훈적이어서

2005년에 나왔던 「가장 아름다운 책」은 講論集보다 훨~ 그랬지.

맞아, “나는 인생파!” 시인이었네.

「나무, 나의 모국어」(2012, 민음사)는 “음, 괜찮네” 했던 「청산행」(1995) 이후 이어온

“이기철 원래 그래”가 뚜렷한.

 

   ‘조그맣게’

 

    잎새들에게 옷 한 벌 빌려 입고

  잎새처럼 함초롬히 사는 일

 

  박꽃이 질까 봐 흰 종이로

  고깔 한 겹 씌워주는 일

 

  달빛 한 되 함지박에 받아 놓고

  서 말 쌀 꿔 온 날처럼 넉넉해지는 일

 

  댕기새 돌 던져 울려 놓고 장고 소리라 우기며

  혼자 하루를 노닥이는 일

 

  햇빛으로 움막 짓고 온종일 나물 냄새 새똥 냄새 맡으며

  저자에도 대처에도 나가지 않는 일

 

  구름이 보낸 편지가 있나 없나

  손가락으로 우체통을 열었다 닫는 일

 

각북에 사신다는데 굳이 청도까지 찾아가야 할 건 아니겠지요?

어른도 받아주는 동화마을 같아.

 

 

 

‘나무’라서 같이 집어 들게 된 책 고규홍의 「나무가 말하였네」(1판 5쇄 2012, 마음산책)

부제가 ‘시가 된 나무, 나무가 된 시’, 제 시는 아니고 나무박사가 제 얘기하노라 끌어온 시 모음.

예순아홉 시인-작고 시인 포함-이 시를 轉載하는 것을 허락했다니 대단한 모음이고

읽을거리는 된다.

 

거기에 고재종 시인의 ‘백련사 동백 숲길에서’란 시가 실렸는데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라는 구절이 있거든.

모감모감? 몰라.

쇠리쇠리? 백석의 ‘바다’에 나오는 말, 평안도 방언으로 ‘눈이 시다, 부시다’라는 뜻인데

고재종은 담양 사람이잖아?

시인이 방언을 쓸 수도 있고 시어를 만들 수도 있고

뜻도 모르며 어감이 좋아 좋다고 읊을 수도 있지만

좀... 그렇다.

 

 

 

그러면 방언 범벅으로 버무린 후에 해설을 붙여봐?

한국시인협회에서 엮은 방언시집 「요 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2007, 서정시학)은

부제 ‘시인 101명, 내 고향 말로 시를 쓰다’가 내용을 금방 알아보게 하는데

‘우야꼬 인자 우짜꼬’ (김종해)를 옆에 ‘어이할꼬 이제 어찌할꼬’로 옮겨 놓으면 김 팍 새는 거지.

경상도 사투리쯤이야 아는 이들 많겠고, 강원도 말? 그건 뭐 경기도 말 비슷한 거 아닌감?

그렇지 않은 것이 ‘울 할마어이의 추억’ (김성수) 보니까

야야, 정지에 가서 흘러깽이와 펀뎅이를 가져온/ 진죠지 만들어 사돈댁 칵 물리자.”는

“얘야, 부엌에 가서 홍두깨와 안반 가져온/ 국수 만들어 사돈댁 실컷 먹게 하자”

평창에서 쓰던 말이라네.

 

私的 언어란 없으니까, 만일 협약과 문법에 의한 公的 언어가 아니라면 소통할 수가 없으니까

표준어를 제정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러니 “지방방송 shut up~!” 식으로 “모든 사투리는 안락사로 소멸시키자?”

그럴 수 없는 거지.

 

Lottery에 생돈 날리라는 ‘공익’ 광고에 “You'll never win till you try.”라는 구절이 있는데

복권 긁어본 적 없으면서 허망한 꿈꾸는 게 웃기는 얘기지만

만일 큰 게 맞는다면 말이지, 그 돈 몽땅 제주도 방언 보존 사업에 돌려주고 싶어.

이제 제주도 토착민 중에서도 젊은이들은 제주도 말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는데

좀 있으면 그냥 그렇게 사멸하는 게 아닌가 몰라.

강통원의 ‘비바리야 냉비바리야’는 아무래도 번역서가 있어야겠네?

하이구 요 비바리야 냉바리야/ 어떵하난 이 한락산 곶자왈 낭밭디/

지들커 하래 요놈의 홀아방 조롬을 좇아와시니/ 아명해도 족족한 노롯이 아니여/

놈들 보민 허주나키여/ 경하나정하나 기왕에 와시민 바지란이 낭이나 하라/

느렁태같이 혜천 배리멍 탈 타먹을 궁리나 하곡/ 아장 망캐지만 말앙 한저 오몽하라”는

“아이고 이처녀야 노처녀야/ 어쩌다 이 한라산기슭 나무숲에/

땔거리 하러 이놈의 홀아비 뒤를 쫓아왔느냐/ 아무래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구나/

남들이 보면 나쁜 소리 나겠네/ 그나저나 이왕 왔으면 부지런히 나무나 하거라/

게름뱅이처럼 한눈 팔며 산딸기 따먹을 꿍꿍이나 하고/ 앉아서 꾸물대지 말고 어서 빨리 움직여라”로.

{Cf. 아래아는 인터넷에 옮길 수 없어 그냥 ‘아’로 표기.}

 

 

 

길어졌네. 하나만 더.

김병무, 홍사성 엮은 「고목나무 냄새를 맡다」(2012, 책만드는집), 霧山禪師頌壽詩集이란다.

아 배 아파라. 그가 누구관대 이름값이 가볍지 않은 원로, 중견 시인 58명이 85편의 시를 헌정하다니.

필명 조오현, 시조집을 낸 시인일 뿐만 아니라 신흥사 祖室로 절을 찾는 문인들에게 도움도 주셨을 것이다.

木月이 지은 ‘대통령 찬가’처럼 그런 類의 시에서 문학성을 따질 것도 아니고

프로젝트에 참가한 시인들의 성의와 자질이 고르지 않지만...

배 아파한 것 죄송.

그렇게 좋은 뜻으로 글 모음을 하여 추어주는 건 암, 지극정성일세.

정치적 편향성이나 명예욕 같은 걸로 갈라서지 말고 문인들이 서로 위해주는 일 좋고말고.

{내용 소개 생략}